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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맥주는 언제였나요?

by 림스

퇴근 후 맥주. 이 자체로 얼마나 낭만적인가. 캐나다로 온 후 퇴근 후 맥주는 내 소소한 일상의 행복이 되었다. 한국에서는 주로 친구들과 마시는 술을 즐겼다. 하지만 여기서는 그렇게까지 할 수 없으니 혼맥을 하며 소소하게 마시고 있다. 특히 비가 오는 밤에 마시는 맥주는 어딘가 모르게 황홀하게 다가온다.


맥주는 상황에 따라 맛이 달라진다. 술을 안 좋아하시는 분들은 '무슨 개소리야?'라고 말씀하실 수 있겠지만 사실이다. 뜨거운 여름날 육체적인 노동을 한 후 마시는 맥주는 평소와 마시는 맥주와 다르다. 특유의 청량감이 목을 타고 내 안으로 들어올 때의 쾌감은 그날의 힘듦을 다 씻겨준다. 호텔에서 일할 때, 손님이 남기고 간 맥주를 일하면서 몰래 홀짝거렸다. 홀짝거리면서 마시는 기분이 마치 농사일을 하다 중간에 마시는 새참 같았다. 이렇듯 상황에 따라 옷을 갈아입는 맥주이다.


내 인생 최고의 맥주는 작년 겨울이었다. 여름에 느꼈던 청량감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캐나다 워킹홀리데이 당시 친해졌던 열정적인 보드꾼 '줄리'와 겁 없는 스키어 '도도'. 코로나 때문에 한국으로 귀국한 후 종종 만나는 사이가 되었다. 우린 휘슬러에서 탔던 스키와 보드의 느낌을 한국에서도 느껴보자는 마인드로 강원도의 한 스키장을 예약했다. 휘슬러에서는 가능하지 못한 야간 스키를 타면서 오랜만에 그 느낌을 살리려 노력했지만 휘슬러에서의 감성이 나오진 않았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었다.


유난히 보름달이 동그랗던 밤, 우린 폐장 시간이 다 되어 장비들을 차에 실었다. 에어비엔비로 잡은 숙소에 도착해 삼겹살과 김치찌개를 준비했고 당연히 옆엔 술도 같이 있었다.


음식 준비를 한 후 다 같이 테이블에 앉았다. 야간 스키를 타고 오니 시간이 꽤 늦었다. 우린 대충 때우는 식의 저녁을 먹었었기 때문에 배가 상당히 고팠다. 스키를 타는 도중 물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아 그만큼의 갈증도 어느 정도 있는 상태였다. 드디어 코스트코에서 파는 1L짜리 하이네켄 맥주를 각 잔에 따랐다. 오늘 고생했다며 서로의 잔을 부딪힌 후 맥주를 목에 털어 넣었다.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맥주는 그간 쌓아왔던 울분을 터트리듯 갈증을 해소시켰다. 우린 잔을 내려놓자마자 서로를 보며


"뭐야. 이거 왜 이렇게 맛있어!"라고 말하며 나만 느낀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했다.


거기다 삼겹살과 김치찌개 안주는 화룡점정. 마치 용을 그리고 난 후 마지막으로 그려 넣은 눈동자처럼 생동감의 완성이었다.


겨울 야간 스포츠를 즐긴 후 마시는 맥주가 이렇게 청량할 줄이야. 아마 다들 갈증을 느끼고 있었는데, 날이 추워 그 느낌을 느끼지 못한 채 몸 안에 축적된 것 같았다. 느끼지 못한 갈증을 맥주가 우연히 풀어주니 그 청량감은 평소와 다르게 다가온 것 같았다. 그 청량감은 오랫동안 몸에서 기억되고 있었다. 그날 마셨던 맥주가 인생 최고의 맥주였다.


캐나다에 있는 나, 새로운 도전을 하고 있는 줄리, 그리고 새로운 도전을 앞두고 있는 도도. 지금은 그때처럼 맥주를 마실 수는 없지만, 각자 열심히 살다가 오랜만에 만났을 때 마시자고 약속했다. 부정확한 불안은 그저 잠시 머물다 지나가는 먹구름처럼 영원하지 않을 것이고, 고난은 갈증처럼 맥주 한 잔에 언젠가 풀릴 것임을 우리는 안다. 우린 각자가 원하는 것을 이루고 만나자고 했다. 그 약속이 한국일지, 캐나다 일지 어디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다시 만나는 날 거품 조금 넘친 맥주와 지나간 추억을 안주삼아 마실 것이다.




퇴근을 하니 비가 부슬부슬 온다.


오늘도 냉장고에 있는 맥주를 어김없이 마셔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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