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in Canada
그런 날이 있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흘러가는 날. 계획했던 일들이 깔끔하게 맞아떨어지는 날. 어제 한국에서 보내온 택배를 받았다. 엄마와 동생이 보낸 보급품이다. 짐이 많아 한국에서 미처 가져오지 못한 겨울 옷들과 각종 한국 음식들이다. 겨울을 앞두고 엄마가 보내준 보급품을 받았다.
겨울 준비와 연말이라는 시기가 겹쳐 비행기 편으로 보낸 물건들이 지연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짧게는 1주, 길면 3주까지 걸린다고 들었다. 또 비행기 편이 코로나 여파로 한동안 중지되었다가 최근에 규제가 풀렸다. 사람들은 그동안 보내지 못한 물건들을 보내기 시작하자 비행기로 받아도 3주가 걸리는 상황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한국에서 보낸 택배를 무사히 받을 수 있을까 걱정이 들었다.
택배를 보냈다는 동생의 카톡을 받았다. 그로부터 4일 후 출근 준비를 하던 도중 택배가 도착했다. 최소 2주는 걸릴 줄 알았던 택배가 도착했다는 전화를 받았다. 아파트 형식의 집이라 1층에서 로비에서 내 방으로 전화를 해줬다. 신나는 마음으로 1층으로 갔고, 한글로 적힌 택배를 보니 괜스레 반가웠다. 운이 좋았다.
짐을 정리할 시간이 없었다. 출근 직전에 왔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집에 없었다면 이 택배는 근처 우체국에서 보관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쉬는 날 내가 우체국에서 찾아야 한다. 다행히 나가기 전에 택배를 받을 수 있었다. 여러모로 운이 좋았다.
일을 열심히 하던 도중 이메일 하나를 받았다. 블랙 프라이데이 때 산 옷이 배달되었다는 메일이었다. 비루한 일상에서 소소한 선물들을 받은 느낌이었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엘리베이터에 내렸고 내 방으로 들어가려는 찰나 문 앞에 무엇인가 놓여있었다. 블랙 프라이데이 때 산 옷이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번엔 문 앞에 두고 갔다. 캐나다에서 살다 보면 가끔 이해할 수 없는 일처리를 느낄 때가 많다. 오늘은 기분 좋은 이해할 수 없는 일처리였다.
들어가서 한국에서 온 짐부터 정리했다. 여러 가지 음식들과 라면들. 올 겨울은 따뜻하게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배달된 옷. 입어보니 사이즈도 딱 맞고 핏도 좋았다. 내일은 쉬는 날이다. 퇴근길에 사 온 위스키를 냉장고에 넣어두고 샤워를 했다.
우려했던 일들이 순조롭게 처리되었다. 계속 오는 비와 바쁜 일들 때문에 우울했던 요즘 소소한 행복으로 기분이 좋아졌다. 낼 쉬는 날이기에 더 향기로운 위스키 한 잔 그리고 영화 한 편. 모든 것이 완벽한 하루였다.
오랜만에 휴일에 눈을 떴다. 항상 흐렸던 하늘이 오늘은 밝았다. 일주일만의 해가 떴다. 응원하던 축구팀의 경기가 있었다. 여유롭게 축구를 봤다. 치고받고, 수준 높은 경기였다. 경기 결과는 3:2. 응원하던 팀이 승리를 했다. 어제 걱정하던 택배를 무사히 받고 응원하던 팀이 이기고, 날도 좋았다. 더할 나위 없는 날씨에 자전거를 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운동할 옷으로 갈아입고 자전거를 꺼냈다.
갑자기 뒷바퀴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끼익. 밝은 쪽으로 나오자 뒷바퀴는 힘없이 축 처진 상태로 주저앉아있었다. 바퀴가 터졌다. 속으로
'어쩐지 모든 것이 순조롭게 흘러간다 했다.'
역시 인생사 다 새옹지마다. 머나먼 땅 캐나다에서도 이 속담은 유효했다. 터진 바퀴를 다시 보았다. 바퀴를 새 거로 교체해야 할 것 같았다. 머리가 지끈했지만 속으로는 안도감이 들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한 번 멈춰갈 수 있었다.
오늘은 그냥 걸었다. 날이 좋아 집에만 있기 아쉬운 날씨였다. 일기 예보를 보자 내일부터 다시 비가 내린다고 한다. 다음 주에는 눈도 내릴 예정이란다. 이렇기에 나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오랜만에 동네 한 바퀴를 돌았다. 해가 지기 시작했다. 마치 오후 5시의 느낌. 하지만 시계를 보니 이제 막 3시가 되었다.
상가와 조금 떨어진 길로 들어갔다. 쭉 이어진 기찻길이 보였다. 그 길로 사람들이 반려견과 함께 산책을 나왔다. 나도 그 길을 나만의 속도로 걷기 시작했다. 조금 걷자 해가 돌산에 걸쳤다. 그리고 불그스름한 3시의 석양. 수평선 너머 들어오는 석양은 여름보다 짙었고 한 참을 바라보며 멍하니 서있었다. 아마 자전거가 멀쩡했다면 이 풍경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순간 터진 자전거 바퀴를 보고 안심했던 이유를 깨달았다.
가라앉았던 마음이 조금은 올라왔다. 좋지 않았던 기억들을 끄집어내 스스로를 괴롭히기도 했고, 없는 상처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냥 그런 마음이 들었었다. 살다 보면 찾아오는 그런 시기들. 날씨의 영향인가, 그냥 그럴 때인가.
걷다, 뛰다를 반복했다. 숨이 차고 호흡이 터지자 정신이 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채우기에만 했던 삶이 비워내지는 기분이었다. 문득 여행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여기 온 이유가 떠오르자 안도감이 들었다. 여러모로 운수 좋은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