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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이 Aug 05. 2024

아빠 어디 가? 우리 집 편 (1)

방학 12일 차

오전 7시. 알람 소리도 없이 눈이 번쩍 떠진다. 학창 시절 수련회를 기다리던 설렘, 대학 시절 짝사랑하던 선배와의 저녁 약속을 앞두고 시간이 느리게 가 답답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오랜만에 설렘과 기대가 가득한 하루가 시작되었다.


오늘따라 가족들은 쉽게 일어날 생각이 없는지,  부엌에서 조용히 설거지를 하고 방마다 불을 켜서 세탁물을 찾아 퉁퉁퉁 세탁기를 돌려도, 다들 잠들어 있다. 방학 동안 깨우지 않았기에 새삼스럽게 아침이라고 깨우기도 애매하다. 알아서 일어나 씻고 아침을 먹으면 좋으련만, 우리 집 남자들은 여전히 잠에서 깨어나지 않는다. 어쩌면 오늘을 나만 기다렸는지도 모르겠다.


오늘은 남편이 결혼 후 처음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시댁이 있는 서울로 가서 2박 3일을 보내고 오는 날이다. 최근 나를 위해 휴가를 내어 13년간 내가 꿈꿔온 '아빠 어디 가?-우리 집 편'을 드디어 실현하는 바로 그날.

혼자서 하고 싶은 일도 많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도 싶어 며칠 동안 행복한 고민에 빠져 있다. 3일 동안 아이들과의 여행 계획을 짜주며 평소에 사지 않는 기념품을 사고 시부모님께 저녁마다 식사 대접까지 하기로 했다. 내가 쓸 비용은 줄어들었지만 마음은 여전히 들뜬다. 하고 싶은 것은 최소한으로 줄이고, 아니면 그냥 집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숨만 쉬어도 우울증 약을 먹지 않고 지낼 수 있을 건만 같다.


8시가 되자 하나둘 일어나기 시작한다. 에어컨을 끄고 환기를 위해 창문을 열어두었더니 다들 더워서 일어나는 것 같다. 이미 마음은 4시간 후로 가 있는 나는 그 사실을 모른 체하며 "잘 잤어?"라는 다정한 말을 건넨다. 가족들이 아침을 먹는 동안 나는 보란 듯이 이불을 정리하고 씻으며 앞으로 해야 할 일을 몸소 보여준다. 꽤나 혼자 있고 싶었던 모양이다.


가족들을 떠나보내고, 나는 모든 불을 끄고 블라인드를 내린 채 혼자 덩그러니 소파에 앉는다. 조용하고 살짝 어두운 차분한 우리 집이라니! 이 장면, 이 느낌을 온몸으로 담아보고 싶어 핸드폰도 끄고, 선풍기도 끈다. 오늘은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게 조용히 하루를 보내기로 한다. 초인종 소리도 나지 않게 배달도 시키지 않고, 외출 준비하는 분주한 움직임도 없도록 현관문 밖으로 나가지도 않은 채 이렇게 가만히 텅 빈 우리 집을 느껴보기로 결심했다.


조용한 집안에서의 첫날, 이렇게 평화로운 고요함은 오랜만에 느껴보는 것이다. 잠깐의 적막이 어색했지만 곧 익숙해진다. 차 한 잔을 들고 거실 창가에 앉아 느긋하게 바깥 풍경을 바라본다. 평소에는 잘 들리지 않던 바람 소리와 새들의 지저귐이 마치 배경음악처럼 들린다.

오롯이 나만을 위한 이 순간들을 어떻게 보낼지 고민하는 것이 즐겁다.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잠들어 있던 독서 취미를 되살리기로 한다. 책장에서 마음에 드는 책을 골라 거실 소파에 몸을 맡기고 천천히 페이지를 넘긴다. 이야기에 빠져들면서 시간은 어느새 빠르게 흘러간다.


점심시간이 되어도 특별히 배가 고프지 않아 간단한 샐러드를 만들어 먹고, 다시 소파에 앉아 여유를 만끽한다.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날은 몇 년 만인지. 시간에 쫓기지 않고, 누군가를 챙기지 않아도 되는 자유로움에 마음이 가볍다.


저녁 무렵, 창문 너머로 해가 지는 모습을 보며 오늘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생각해 본다. 평소의 분주한 일상 속에서 잊고 지냈던 나 자신을 되찾은 것 같다. 오늘의 이 고요함이 내 마음속에도 오래도록 남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남아있는 나만의 시간을 온전히 즐기기로 한다.


지금 나는 누가 뭐래도, 영화 <리틀 포레스트>의 김태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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