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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 설 Oct 31. 2022

꿈이라고 말해줘

7화

 하얗고 가녀린 그녀의 다리 사이로 쏟아진 양수가 침대를 흠뻑 적셔 놨다. 처음 경험하는 모든 상황이 힘들었지만, 무엇보다 차분해질 필요가 있었다. 만삭의 임산부를 업고 뛸 수는 없었다. 그녀가 정신을 차릴 수 있는지 흔들어 보았다. 희미하게 눈을 떠 보이는 그녀, 그 눈만큼이나 희망이 생겼다. 정신을 완전히 잃은 것 같지는 않았다. 그녀를 일으켜 세워야 했다. 나만큼이나 큰 키에 배마저 불러 엘리베이터까지 이동하기에 힘에 부쳤다. 엘리베이터는 여전히 8층, 지금 위치에 멈춰있다. 버튼을 누르고 그녀의 몸을 내 어깨의 힘으로 지탱하게 한 뒤 엘리베이터의 숫자가 내려가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먼저 그녀를 뒷좌석에 눕혔다. 행여나 병원에 도착도 전에 출산하게 될까, 조금이라도 편안하게 누워있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였다. 급하게 시동을 켜고 겨우 도로로 진입했다. 순식간이었다. 순간 그녀가 힘겹게 목에 힘을 쥐어짜며 무언가를 찾아 달라고 했다.      


 “산아.. 산모수첩.. 침대 옆.. 산모..”

      

 일단 차를 돌려 다시 오피스텔로 향했다. 한시가 급했다. 급한 김에 오피스텔 지하 주차장이 아닌 건물 앞 장애인 지정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경비실을 살폈다. 경비원에게 그녀를 잠시 부탁하기 위함이었지만 경비실은 텅 비어있었다. 차에서 그녀가 기다리고 있다. 살이 찢기는 고통을 참으며 기다리고 있다. 난 정신없이 다시 8층을 올라갔다. 침대 위엔 그것을 챙기려고 부여잡았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10개월의 여정이 담긴 초음파 사진과 메모들은 구깃구깃해지고 양수에 일부가 젖어 사진은 누렇게 번졌다. 로비로 향하던 엘리베이터가 2층을 지나갈 무렵이었다. 무언가 묵직한 것들끼리 부딪힌 듯한 굉장한 굉음이 들렸다. 엘리베이터가 추락한 줄 알았다. 그러나 엘리베이터는 태연하게 1층에서 멈추고 문이 열렸다. 그리고는 난 그 앞에서 더는 발을 뗄 수 없었다. 그건 악몽이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났던 굉음은 음주 후 졸음을 이기지 못한 트럭 운전자가 오피스텔 바로 앞에 주차해 놓은 내 차를 들이받으면서 발생한 악몽의 소리였다. 내 차는 트럭의 힘에 못 이겨 오피스텔 1층 통유리를 뚫고 앞 범퍼가 오피스텔 경비실까지 튀어나와 있었고 트렁크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찌그러졌다. 이럴 수는 없는 일이다. 나는 다급하게 경비를 찾았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고 트럭 운전자는 그 사고를 내고도 하차하지 않은 채 클락슨을 계속 울리고 있었다. 나는 급한 김에 소화전의 비상벨을 눌렀다. 그리고 그녀에게로 달려갔다. 그 모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처참했다. 아까 흐르던 맑은 양수는 피로 물들었고 그녀의 팔과 다리가 찌그러진 자동차 사이에 끼어 있었음에도 그녀는 신음하지 않았다. 흔들어 깨우고 있는데 비상벨 소리를 듣고 직무유기를 한 경비원이 혼비백산해 뛰어왔다.     


 “아이고. 뭔 일이래. 신고했어요? 차에 사람이 있어?”     


 주먹이라도 날리고 싶었지만 신고가 더 급했다. 그에게 내가 언어장애가 있음을 밝혔다. 경비원은 급히 119에 신고를 했다. 그리고 난 그녀를 차에서 꺼내야 했다. 계속 팔에서 피가 흐르고 있는 게 보였다. 과다출혈이 염려스러웠다. 당황하던 경비원도 돕기 시작했다. 그쯤 비상벨을 듣고 오피스텔 입주민들이 하나둘 1층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8층 아가씨 남자 친구 아니에요?”

 “안에 사람이 있나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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