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리스트

# 나 다큐하고 있니

by 김은진

얼마 전 방송 아카데미 동기들을 만난 날, 나는 조금 놀랄만한 걸 보게 되었다. 방송일을 그만둔 나와 다르게 활발하게 일하고 있는 한 언니가 나에게 보여준 건 바로 방송 제작사, PD, 작가들의 평판이 담긴 찌라시(블랙리스트)였다.


가끔 친구들 단체 채팅방에 올라오는 연예인 찌라시같은 장문의 텍스트. 조금 놀랐지만 호기심에 가득 찬 눈으로 빠르게 글을 훑어 내려갔다. 그러다 내가 일했던 제작사와 함께 옛 동료들의 이름을 발견했다.


**TV - 막내들한테 청소시키고 대표가 돈을 엄청 아낌. 정수기에서 벌레가 나왔다는 소문이 있음.
**팀장- 아이템 회의할 때 작가들이 낸 건 다 까고 자기가 낸 아이템만 좋아함. 유부녀 작가와 바람나서 **제작사에서 쫓겨났다고 함.
**작가 - 일 하나도 안 하고 서브 작가들에게 다 미룬다. 완전 무능력.


코멘트들은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고 내가 겪은 그대로, 내가 몰랐던 최근 근황까지 적혀있었다. 찌라시 내용들을 친한 언니와 하나씩 확인하면서 읽어 내려갔다.


‘대박!’, ‘와~딱 맞아, 소름!’ 추임새를 연발하며 읽어 내려가다 이 찌라시가 처음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궁금해졌다. 잠시 생각을 해보니 이 찌라시가 왜 만들어졌는지 그 이유를 금방 추측할 수 있었다.


프리랜서인 작가와 PD들은 매번 프로그램이 종영되거나 개편되면 다른 팀으로 옮겨 다녀야 하기 때문에 어디서 누구와 일할지 매번 선택해야 하는 입장이 된다. 그럴 때마다 항상 주변 동료들에게 “○○작가 (PD·제작사) 어때?”라고 물어봐야 하는 상황이 빈번하게 생긴다.


아마 처음 누군가가 자신이 겪었던 안 좋은 제작사와 함께 일하기 힘들었던 사람들을 적었던 것이 시작이지 않았을까? 주변 작가들이나 PD들이 자신처럼 고생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런 선한 동료의식에서부터 시작된 일이었을 테다.


그렇게 처음엔 몇 문장이었을 글이 주변으로 퍼지고, 한 명씩 돌아가며 덧붙여 적은 내용들이 불어나 어느새 작가들 단체 채팅방에 뿌려지는 장문의 찌라시가 된 것일 거다.


약속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찌라시에 적힌 옛 동료들을 한 명씩 떠올려 보았다. 작가들의 아이템을 매번 신나게 까던 팀장은 내가 방송일을 그만두겠다고 말하자 다른 곳을 소개해줄 테니 방송일을 그만두지 말라고 유일하게 나를 붙잡은 사람이기도 했다. 서브 작가들에게 일을 미루던 메인 작가 역시, 아픈 사람이 있으면 휴게실에서 쉬고 오라고 먼저 배려해주던 사람이었다.


생각해보면 내가 겪었던 모든 동료들은 어느 일터에든 있을 법한 사람들이었다. 가끔씩 짜증 나고 싫지만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아무렇지 않게 일할 수 있을 정도의 딱 그 정도 구성원이었을 뿐. 아주 좋은 사람도, 나쁜 사람도 아니었던 보통의 직장 동료들이었다.


그러면서 살짝 오지랖일지도 모르는 걱정이 들었다. 찌라시의 당사자들이 글을 보게 된다면 어떤 심정일까? 자신에 대해 적힌 부정적인 코멘트들을 찌라시로 보게 되는 상황을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 심란했다.


한때 자신과 일했던 동료들이 적었을 코멘트를 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 자신이 일해온 방식을 반성할 수도, 함께 일하는 동료들을 더 이상 믿지 않게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나쁜 건 피하고 보자 하는 마음으로 만들어진 찌라시. 그 글만 보고 사람을 가리게 되는 상황도, 옛 동료들의 몰랐던 근황을 알게 되는 기분도 썩 유쾌하진 않은 것 같다.


상처 받지 않기 위해, 나쁜 건 피하고 싶은 마음에 하게 된 작은 일이 오히려 서로를 가로막는 벽을 만들고 있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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