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누구보다 강한 사람이었다(아니 그렇게들 알고 있다). 평소에도 외로움 따위 모르는 사람처럼 얘기했다.
“뭐가 심심해? 집에서 성경 읽으면 되지.”
이랬던 엄마가 천천히 시들어갔다.
엄마가 외로웠구나 느낀 건,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이 흐른 뒤였다.
그나마 몇 년 전 엄마가 욕실에서 쓰러지신 건 불행 중 다행이었을까.
가벼운 찰과상이었지만 언제 또 그런 일이 생길지 몰라 동생 내외가 들어와 살게 됐다.
사실 동생이 여러 번, 엄마가 좀 이상하다고 얘기했지만 난 동생 말을 믿지 않았다. 엄마가 이상할 리 없다고, 원래 늙으면 다 그렇지 않냐고 무시했다.
그렇게 엄마가 아무것도 아닌 일에 우기고, 고집 피우고, 의심하고, 변덕 부리는 일이 잦아지면서 동생은 시집살이 아닌 시집살이를 해야 했다.
그러나 엄마의 의심이 주변 사람들로 향했다. 아무개가 내 물건을 가져갔다, 그 사람이 나를 속였다고 하소연하는 일이 늘어났다.
병원에 안 간다는 엄마를 읍소하다시피 설득해 지방자치단체에서 운영하는 ‘치매안심센터’로 모시고 갔다. 그곳에 가면 협력병원이 연결돼 있어 진단 이후 과정이 순조롭다는 이야기를 들은 터였다.
우리의 예상과 달리(!) 엄마의 상태는 치매로 넘어가기 직전인 ‘경계’ 단계로 진단됐다. 대부분의 치매 환자가 그렇듯, 엄마 역시 고도의 집중력으로 웬만한 문제를 통과했기 때문이다.
엄마는 그것 보라며 우리를 안심시켰고, 결국 때를 놓쳤다. 치매 약인 ‘아리셉트’를 드시기 시작한 건 그로부터 한참 시간이 흐른 뒤였다.
생각건대 엄마에게 생긴 치매의 싹은 외로움에서 시작된 듯하다.
엄마는 일요일에 교회 다녀오는 것 빼고는 거의 하루 종일 집안에 계셨고, 다른 사람들과 교류하지 않았다.
성격도 까칠(당신 표현으로는 깔끔^^)해서 아무 하고나 사귀지 않았고, 쓸데없이 밥값 써가며 만나는 모임도 싫다 하셨다.
어느샌가부턴 동네 산책도 하지 않았고, 매일 가시던 새벽 기도도 나가지 않았다.
자식들은 바빴고, 멀리 살았고, 방심했다.
나 역시 퇴직한 뒤에야 엄마의 상태를 제대로 알 수 있었다. 친정에 머무는 동안 24시간 엄마를 지켜보며 절망했다.
우리는 치매에 대해 무지했고, 엄마의 변화를 예민하게 감지하지 못했다.
그리고 뒤늦게 깨달았다.
나이 들어서도 일상적으로 만나는 네트워크가 필요하다는 것을.
매일 활력을 느낄 수 있는 운동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냥 가만히 계시라는 게 배려가 아님을. 예전 같지 않아도 소소한 집안일은 그대로 하시게 하는 게 좋다는 것을.
감정의 변화를 노화라는 말로 퉁쳐서는 안 된다는 것을.
치매에 걸린 엄마를 돌보며 내게 닥쳐올 가까운 미래가 걱정됐고, 거창하게 국가적인 과제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단순히 치매 보험에 드는 것만으로 안심할 수 없는, 지금 당장 대비해야 할 재난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극히 개인적인 엄마 이야기를 공유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그런 이유에서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엄마를 돌보면서 느낀 생각들, 요양원에 모실 수밖에 없었던 이야기를 통해 치매에 대한 관심이 조금이라도 늘어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