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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랑 Nov 08. 2023

무사히 지나간 디데이

좌충우돌 정신과 입원기(11)

입원 43일차

조금 오만하게 생각해 보기로 했다. 내가 디데이에 자해/자살 시도를 하지 않는 이유는 나를 살릴 기회를 드리는 거라고. 소중한 전공의 선생님과 교수님께. 교수님 말대로 재밌게 디데이를 보내는 것도 의미 있겠단 생각이다. 이 생각이 내일까지 이어지면 좋겠는데. 노력하고 싶지 않다. 그럼에도 내 생각을 바꾸려 애쓰는 이유는, 모르겠다.


입원 44일차

백며칠부터 꼬박 기다려왔던 디데이. 입원 초만 해도 ‘진짜로’ 이 날까지 입원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근데, 나름 즐겁게 보냈다. 전공의 선생님과 상담 한 시간 넘게 하고, 교수님이랑 탁구도 치고. 우울해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게 내 맘대로 되는 건 아니지만 일부러 나가서 복도에 있는 컴퓨터로 줄줄 아무 말이나 쓰고 회진 도는 선생님들 구경하고 그랬다. 저녁 먹고는 스스로 자해 가능성이 있는 모든 물건을 반납했다. 선생님은 이걸로 자해할 생각을 했다구요? 이런 반응이셨는데 확실히… 기상천외하긴 했다. 물건 다 반납하고도 올라오는 충동에 스스로 격리실 들어갔다. 사고 안 치고 제 발로 들어간 게 얼마나 다행인지. 좀 뿌듯하기도 했다.


“제가 하랑님을 아끼는 것만의 반이라도 하랑님이 하랑님을 아끼면 좋겠어요.” 전공의 선생님께 들은 말. 그냥 날 엄청 생각해 주신 전공의 선생님께 너무 감사할 따름이다.


입원 45일차

나에게 이 날이 찾아올 줄이야. 근데 진짜 왔네.


치료 공동체에서 클로즈에 있던 남자분이 자신을 성폭행 가해자라고 소개했다. 그리고 그 자리엔 또 다른 성폭행 피해자가 있었다. 어찌 보면 당당하다는 듯이 성범죄 사실을 그것도 네 번이나 라고 밝힌 남자는 대체 무슨 생각이었을까. 자꾸만 회상하게 된다. 법이 그에게 감방 대신 치료를 내린 이유는 뭘까. 피해자는 대체 무슨 죄로. 치료 공동체가 끝나고 나와 같은 방을 쓰던 피해자는 담당의 선생님과 이야기를 하며 분노를 들어냈다. 난 그 자리에서 그 아이가 뛰쳐나가지 않은 것, 그 남자에게 화내지 않은 것이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또 드는 생각. 분노는 어떤 감정인가. 나는 내가 겪은 일에 비해 합당한 분노를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이(가지고 있지 않던 드러내지 않던) 더 이상 바라는 게 없기 때문이라 생각해 왔다. 하지만 이건 나의 경우고. 그렇다면 분노는 어디서 오는 감정인가. 주로는 불합리한 일을 당했을 때. 때로는 그게 자기 자신이 아니더라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건 감정이란 건 항상 근원이 있기 마련이니까. 항상 쌤들이 물어보는 것도 그거고. 분노의 근원은 원망? 원망의 근원은… 뭘까. 어쩌면 근원이 아니라 유사의 단어일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든다. 근데 감정이란 건 상대적이니까. 근원이다 유사다 판단하기 어려울 것 같다.


입원 46일차

솔직히 아직 퇴원은 겁난다. 내가 그만큼 단단해졌는지 모르겠고 견딜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근데 배운 건 있다. 하루씩 살아가기. 자꾸 잊어버리지만… 하루씩 사는 게 참 어렵다.

분노는 정당한 감정이라고 교수님이 그러셨다. 분노가 존재할 수 있다는 걸 인정하는 게 필요하다고.

인생은, 애를 쓰지 않으면 굴러가지 않는 거 같다.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그냥 힘을 풀어버리면 그대로 잠식되어 버린다. 그렇다고 너무 힘을 줘도 무너지니 그 사이 어딘가에 떠 있어야 하는 걸까.


나의 하루

7:20-7:40 쯤 아침 식사가 온다. 난 최대한 침대에서 밍기적 거리다가 식사가 도착하면 그제서야 일어난다. ​


~12:00 열 두시 전까지 자지 않는 게 퀘스트여서 그때까지 어떻게든 버티려고 한다. 핸드폰이 나오기 전인 8:00부터 9:00까지는 공용 컴퓨터로 노닥거린다. 오늘은 10:00쯤에 전공의 선생님이 오셨고 같이 탁구를 쳤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 때우고.. 트와일라잇 읽다가 알리 들어갔다가 하며 한 시간을 더 보낸 뒤 12:00가 되자마자 침대로 직행했다ㅋㅎㅋㅎㅎ​


12:30~ 점심을 먹고(오늘 점심은 초계국수. 오늘 무슨 날이여?) 계에에속 누워있었다. 그냥 침대와 한 몸이 되어. 그러다 1:30 쯤에 새로운 분이 들어오셨고 방을 혼자 쓸 수 있을 거란 기대는 사라졌다.ㅋㅋㅋ 더더 침대에 붙어있다가 2:00가 2:30에 엄마가 와서 잠깐 면회하고 교수님 본단 핑계로 빨리 빠져나왔다. 그리고 좀 있다 교수님이랑 면담. 내가 살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남은 시간은 주로 트와일라잇을 봤고 자지는 않고 졸며 보냈다. ​


내가 지금 읽고 있는 책이 5권쯤 된다. 집중력과 흥미가 오래가지 않다 보니.. 뜨개질이었음 문어발 만든 격. ​


그렇게 저녁까지 대충 먹고 디엠 하다가, 트와일라잇 보다가, 뉴스 보다가… 산만한 저녁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리고 곧 9:00가 되기 때문에 핸폰 제출해야 한다. 하루 일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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