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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랑 Nov 16. 2023

우울의 경계에서

좌충우돌 정신과 입원기(12)

입원 47일차

금요일. 내가 싫어하는 금요일. 나는 왜 여전히 살아있는가 의문이 드는 아침이다. 지긋지긋하게 찾아오는 충동. 아침부터 왜 이리 나를 괴롭히는 건지.

컴퓨터를 쓰려했는데 이미 다른 분이 쓰고 계셨다. 강제 글쓰기 당첨인 건가.

유령이 되고 싶다. 유령은 남을유 자 써서 남은 영이라는 의미일까. 어디까지나 추측이지만 꽤나 그럴듯한 것 같기도.


어리다. 블로그에서, 여기서, 주면 사람들에게 참 많이 들은 말이다. 10대의 마지막 여름을 이곳에서 보내고 있는 입장에서 아직 어리고 가능성이 무한하단 소리를 들으면 안타깝게도 잘 이해가 안 간다. 난, 글쎄. 나 같은 10대의 시간을 살더라도 10대로 살고 싶은지 묻고 싶다.


나가고 싶은 마음 30% 안 나가고 싶은 마음 70% 아직 이런데 내가 퇴원해도 될까? 솔직히 전공의 선생님만 계속 계신다면 여기 눌러앉고 싶은 마음도 있다. 그치만 또 주치의가 바뀌는 건 너무너무 싫다. 솔직히 맨 처음에 입원 권유받았을 때 하기 싫었던 딱 한 가지 이유가 주치의 바뀌니까였다. 그리고 나가서 뜨개질하고 싶다. 근데 정말이지 집으로 돌아가는 걸 상상하면 숨이 좀 막힌다. 무기력한 시간들. 매주 3번 정신과에 가고, 엄마의 잔소리를 듣고, 이유 없이 눈치가 보였던 날들. 그 시간들이 난 전혀 그립지도 되돌아가고 싶지도 않다. 그냥 그곳은 나에게 ‘집’이라는 공간 자체의 정의가 안 되는 거 같다. ‘집’이라고 불리는 공간 속엔 항상 악당이 존재하고 있었으니. 애당초 나에게 집이란 개념이 있는지도 의문이다. 통상적으로 생각되는 ‘집’이란 걸 배우긴 했어도 익히진 못 한 느낌?


죽밥 프로젝트를 알게 되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일단 한다는 건데 난 일주일에 브런치 글 하나씩 올리기로 했다. 좋은 프로젝트인 거 같다.


입원 48일차

앞에 두 분이 나란히 누워계신 걸 보면 나도 눕고 싶어 진다. 솔직히 주말은 버티기 너무 어려워.


엄마가 면회 왔는데 이유 없이 짜증을 내버렸다. 왜 그랬을까. 너무 귀찮았다. 짜증이 났고 그걸 그대로 노출해 버렸다. 엄마는 계속 물었다. 무슨 일 있냐고, 힘드냐고. 그 말들이 왜 이렇게 듣기 싫은지. 엄마 때문이라 쏘아붙이고 싶었다. 근데 차마 더 상처 주는 짓을 하고 싶진 않았다. 내가 너무 미워진다. 다시금 느끼는 거지만 그건 내가 엄마를 사랑하기 때문이겠지. 그게 너무 싫다.

그래 엄마, 난 엄마를 사랑했던 거 같아. 사랑해서 더 용서하기 어려워. 왜 그랬어? 아빠 때문이란 변명 말고. 실은 내가 정말 싫었던 거 아냐? 엄마가 나에게 했던 말, 거기엔 진심이 담겨있었다고.

이젠 지쳐서 눈물도 안 나온다.

엄마에게 보내지 않을 편지를 써보란 전공의 선생님 말에 편지를 써 보았다.


엄마에게.

안녕 엄마. 보내지 않을 편지를 써 본다. 나도 내가 왜 화가 났는지 모르겠어. 하루종일 오늘 면회에 대해 생각할 엄마를 위해 사과 문자를 보내지 않은 이유도 모르겠고. 있지. 난 왜 그랬냐고 묻고 싶다. 아무리 진심이 아니었다고 이야기한들 난 날 원망하던 엄마의 표정이 생생해. 미안함 보다는 모든 일이 나로 인해 일어난 것처럼 이야기하던 엄마가. 그 일들 뒤로 엄마한테 사랑한다는 말을 못 하겠더라고. 빈말이라도 하고 싶지 않았어.


입원 49일차

어제 그렇게 일이 있고 난 오늘 만남을 피하고 싶었지만 방도가 없었다. 뭐 어떡해… 그냥 다 괜찮은 척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놨지. 무려 한 시간을. 내가 말하고 싶었던 건 그게 아니었는데.


엄마. 미안해. 난 아직 엄마를 용서할 준비가 안 된 거 같아. 하지만 마음과 다르게 난 엄마를 용서한 것처럼 굴겠지. 엄만 그걸 믿지 않겠지만 또 거기에 장단을 맞춰줄 테고. 서로의 속마음을 숨긴 채, 서로의 거짓말에 알면서도 속아주는 이런 관계가 언제쯤 끝날까. 내 앞에서 죽겠다던 엄마를 보며 난 스스로를 방어하듯 되뇌었어. 넌 로봇이야. 넌 감정이 없어야 해. 엄만 내가 감정을 알 수 없어서 힘들다고 했잖아. 근데 그거 내가 정말 노력한 결과야. 알아? 근데 그렇게 몇 년 되뇌다 보니까 진짜 무뎌지긴 하더라. 정말, 매일 밤마다, 소리 없이 울부짖었어. 주님, 나 살려주세요. 당신의 자녀를 사랑하신다면서요. 내가 지금 이렇게 힘들어하고 있는데 왜 외면하시냐고 따졌어. 매일 밤. 지금보다 더 선명하게 떠오르는 잔상들과 싸우며 정말 고통에 몸부림친단 표현에 맞게. 그때 일기들을 보면 그렇게 불안정할 수가 없더라.


나는 지나치게 순종적이었고 그래서 엄마는 자신의 방식이 옳다고 생각한 거 같다. 부모 자녀 관계에서 응당 있어야 할 부딪힘조차 난 만들지 않았으니. 그게 내 인생에서 잘못이라면 가장 큰 잘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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