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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랑 Oct 06. 2023

살아서 해보고 싶은 것

좌충우돌 정신과 입원기(6)

입원 15일차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 무기력하고… 아무것도 안 되고. 그래도 오랜만에 건전하게 하고 싶은 게 생겼다. 큐브 맞추기. 근데 3*3 큐브는 너무 쉽고 다른 것도 웬만한 건 예전에 맞춰봐서 15*15 큐브를 샀다. 진짜 비싸다. 그래도 시간 때우기에는 적합할 것 같다. 손을 움직일 수 있다는 장점도 있고.

전공의 선생님 면담에서는 조급해하지 않고 마음을 넉넉하게 먹어도 될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하셨다. 그리고 다음 주부터 선생님이 휴가를 가신다는 소식을 들었다. 근데 선생님 다시 오실 때까지 나 입원해 있을 것 같아서 내 입원기간 얼마로 생각하고 계시냐 여쭤봤더니 90일(맥스)라고 하셨다. 결국 나중에 이러저러해서 59일 만에 퇴원하긴 했지만. 소리 지르고 싶으면 부르라고 하셨다. 같이 질러 주신다고. 쌤 진짜 최고. 그리고 또 모범생이란 소리를 들었다. 어딜 가나 빼먹지 않고 듣는 소리네.

친구가 좀 힘들어 보인다. 근데 난 해줄 수 있는 게 없다. 친구는 내가 힘들 때 도움이 많이 되어줬는데 난 눈치만 보는 중이다. 어떻게 좋은 말이라도 해 주고 싶은데 머리가 텅 비어버려서 기억나는 말이 없다. 내가 좀 밉다.

교수님은 잘하지 않아도 괜찮고 이미 잘하고 있다고 말씀하셨다. 나를 위험에 빠뜨리는 관계라면 손절을 생각해야 한다고 부모님과의 손절을 돌려 돌려 권하셨다. 그러면서 생각을 많아지게 하는 것 같아 미안하다고 하셨다. 그리곤 숙제를 주셨다. 살아서 해 보고 싶은 것 써보기.

엄마는 나의 정신과 입원 사실을 동생에게 솔직하게 말하지 않았고 대신 간염에 걸렸다는 식으로 둘러댔다. 하지만 눈치 빠른 동생은 사실 확인을 위해 나에게 전화를 했고 멀쩡한 내 목소리와 수상쩍은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닌 엄마의 변명 등의 단서를 종합해 나를 추궁했다. 나는 거짓말에 동참하고 싶지 않았고 굳이 내 입원 사실을 동생에게까지 숨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사실대로 말해줬다. 정말 엄마가 동생이 ‘걱정’ 할 까봐 정신과 입원 사실을 숨긴 거라면 좀 더 치밀하게 준비했어야 하는 거 아닐까. 어물쩍 넘어갈 게 아니라.

살아서 해보고 싶은 것 적어보기


입원 16일차

비가 정말 왕창 쏟아진다. 폭포 소리가 난다. 이런 날 죽는 게 내 로망이었는데. 동생이 보러 온다고 한다. 이렇게 비가 많이 오는데.. 우산은 가지고 다닐련지… 어제 내가 교수님과 면담하느라 전화를 3번이나 못 받았더니 나 죽은 줄 알았다고 한다. 나 걱정했다고 하는데 기특하면서도 미안하고 그렇다.

- 정말 죽겠다고 마음을 먹으니, 뜻밖에도 기운이 났다.
- 죽을 계획을 세우고 나니, 마음이 편해졌다. 놀랍게도 홀가분하고 약간 기뻐지는 것 같기도 했다.
<죽고 싶은 사람은 없다> 중에서

책을 읽다가 눈에 박힌 구절이다. 내가 이상한 게 아니구나 싶었고 경력 있는 정신과 의사도 자신의 자살 충동을 어쩌지 못했다는 게 이상하게 위안이 됐다.

전공의 선생님과는 관계에 대해서 이야길 나눴다. 긍정적인 영향만을 주는 관계는 없다는 거. 그리고 선생님이 유학파라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됐다. 그래서 열심히 한국의 입시 제도를 설명해 드렸다. 또 교수님은 나를 장기 입원 시키실 계획인 거 같다고 하셨다. 이때까진 장난인 줄 알았는데 진심이신 것 같았다. 게다가 디데이까지 같이 보낼 것 같다 그러셨다. 그렇게 백몇일 전부터 세던 나의 디데이는 물거품이 되었다..

교수님께 어제 적은 살아서 해 보고 싶은 것 리스트를 보여드렸고 칭찬받았다. 창밖에 풍경을 감상하고 보이는 거 말하고 뭐 그런 걸 했는데 복잡하던 마음이 훨씬 편안해졌다. 교수님은 내 안에 의심의 싹을 하나 틔우는 게 목표라고 하셨다. 자긴 죽고 싶어 하는 나를 살고 싶게 만드는 능력이 없다고 하시면서 진짜 죽는 것 만이 최선의 선택일까? 하는 의심 어린 물음의 싹을 틔우는 게 목표라고 말하셨다.

동생은 엄청난 빗줄기를 뚫고 기어코 병원에 바나나 우유 여섯 개를 사들고 왔다. 맙소사 바나나 우유 여섯 개라니. 동생은 늘 그렇듯 나를 놀리고 어이없고 웃기게 만들었다. 특유의 뻔뻔하고 능글능글한 말투로 나를 정신없게 하고는 지나가는 내 담당 교수님을 붙들고 우리 누나 좀 잘 부탁한다며 또 나를 민망함에 웃게 했다.


입원 17일차

오늘따라 왜 이렇게 코드 블루가 많이 뜨는지.

내 나이 또래 같은 교수님 환자들끼리 모여서 공부를 했다. 참 답답한 건 아무리 집어넣어도 도무지 기억이 안 난다는 것. 그리고 뭘 어떻게 얼만큼 공부해야 할지 감이 안 온다. 검정고시 쉽다고 쉽게 공부하면 기초가 흔들릴 테고 그렇다고 내신 공부하듯이 빡세게 하면 시간이 부족할 거고.

오랜만에 친구랑 통화했다. 보고 싶기도 하고 그립기도 하고. 내가 못 죽는 이유 중에 하나인 친구다. 내가 사라지면 어떨 것 같아?라는 질문에 못 견딜 것 같다고 현실을 부정할 것 같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난 정말 이기적인 인간이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려는 걸까. 8월 8일에 죽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굳이 굳이 일기에 디데이를 적는 이유는 뭘까. 나도 모르겠다. 죽는 건 내 희망이었는데 그걸 쉽게 포기하고 싶진 않은가 보다.

공부. 공부. 공부. 교수님은 분명 느낌만 내는 공부를 하자고 하셨지만 내 완벽주의가 발동하는 건 어떻게 해야 하지? 공부할 노트 사고, 인강 검색하고… 내 머릿속은 또 24시간을 공부로 채우려 한다. 계획하기로는 막 15개짜리 인강 다 듣고 퇴원하면 좋겠다 이런 생각 하고 있고. 누가 나 좀 말려봐요. 이러고 공부 안되면 또 스트레스받고. 알면서도 참 어리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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