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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자마카롱 Aug 25. 2020

엄마의 특별한 조기교육

1998년. IMF로 인해 저희 아버지도 권고사직을 통보받고는 어머니와 함께 조그맣게 트럭 장사를 시작하셨어요.

늘 날이 바짝 선 양복에 고운 색깔의 넥타이를 고르고 골라서 매시던 아버지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품이 너무 넓어서 어색해 보이는 낡은 초록색 점퍼 한 장을 걸치신 채, 어머니와 함께 늘 새벽 3시~4시쯤 집을 나서셨어요. 그렇게 두 분은 농수산물 시장에 가서 트럭 한가득 수박이며, 감자, 사과, 포도 등을 싣고 오신 뒤 그 큰 트럭이 다 비울 때까지 장사하셨어요. 밤 아주 늦게서야 아주 지친 두 분은 집에 돌아와 물에 찬밥을 말아서 밥 한술을 드신 뒤 잠깐 눈을 붙였다가 다시 또 새벽 3시에 일어나서 시장을 가시는, 그렇게 자식 둘 만큼은 배곯게 하지는 않겠다는 일념으로 쉼 없이 일을 하셨어요.


엄마의 특별과외

어머니가 다시 밖에서 일하게 되면서, 저는 엄마에게 특별과외를 받게 되었어요. 수강과목은 바로 '따뜻한 밥을 지어서 제대로 한 끼를 동생과 잘 차려 먹기' 이였어요. 엄마는 차례차례 정성 들여 밥을 짓는 법을 몇 번이나 보여주고 알려주셨고, 저는 조금 떨리는 마음으로 엄마 앞에서 쌀을 깨끗이 씻고, 밥물을 제 작은 집게손가락 한 마디 반쯤 물을 맞춘 뒤, 밥통 바닥을 물기 없이 닦아서 밥솥의 안쪽 선에 딱 들어가게 끼우고, 뜸을 들이고, 주걱으로 살살 뭉치지 않게 밥을 담는 것까지 통과하고 나서야 엄마의 엄지손가락이 척-올라가는 것을 볼 수 있었어요.


미역국은 매년 끓일 때마다 엄마 생각이 더 간절해지네요.


냉장고에 있는 반찬은 깨끗한 젓가락을 사용해서 작은 반찬 그릇에 꺼내어 먹을 만큼만 덜어 먹어야 다른 사람들도 오랫동안 신선하게 맛있게 먹을 수 있다고, 특히 김치는 오래 먹는 음식이니 꼭 먹을 만큼만 속을 헤집지 않고 잘 꺼내고, 김치를 자르는 가위도, 집게도 깨끗해야 한다면서 엄마는 제 눈높이에 맞게 보여주셨어요.

그리고 마지막 수업으로, 남동생과 제가 좋아하는 알록달록한 색깔에 당근, 파를 송송 넣고 치즈가 잘 녹은 간단한 계란찜 같은 간단한 요리를 배웠어요. 이전에는 엄마가 부엌에서 식사 준비를 할 때는 도와만 드리다가 제가 직접 하나하나 하는 재미에, 그저 저는 모든 게 새롭고 즐거웠지만, 나이가 들어가면서 이제야 알게 되었죠. 만 아홉 살인 딸내미에게 손수 밥과 반찬을 짓게 하고, 남동생을 챙겨야 한다고 말하는 엄마의 심정이 어땠을지-




그렇게 엄마에게 배운 대로 남동생이 유치원에서 돌아오면 우유 한 컵과 엄마가 사다 놓은 빵을 손으로 뚝 떼서 잘라주었어요. 학습지 선생님도, 피아노 선생님도 왔다 가시고 그렇게 저녁때가 되면 놀이터에서 놀다가 배가 고파진 남동생과 함께 냉장고에 있던 반찬과 국을 데워서 밥을 먹이고 저도 챙겨 먹곤 했어요. 점차 주방에 있는 시간이 익숙해지면서, 남은 밥으로 김치볶음밥도 해 먹고, 참치 한 캔과 완두콩을 넣은 짜장라면도 끓여 먹고, 어느 날은 감자를 강판에 갈아서 치즈를 올린 감자전도 해 먹으면서 그렇게 저희 남매는 잘 챙겨 먹고, 챙겨주면서 커왔어요.


짜잔. 소박하지만 제 손으로 차려먹은 생일상입니다.

그리고 20년이 더 훌쩍 넘은 지금, 밥물을 맞출 때마다 조심조심 두근두근했던 그 아홉 살배기 아이는 어느덧 제 손으로 제 생일상을 차리고, 다른 사람들도 대접할 줄 아는 어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먹고산다는 게 얼마나 소중하고 어려운지, 무슨 일이 있어도 내 자식만큼은 굶기지 않고 세상에서 제일 좋은 것만 보여주고,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것만 먹이고 싶은 그 마음이 얼마나 깊고 간절한 마음인지 이제야 감히 그 마음을 가늠해보며 살아가고 있어요.


엄마는 가끔 제가 멀리서 차린 음식 사진을 메시지로 보내드리면

'나는 너를 살림이나 음식을 제대로 가르친 적이 없는데, 어떻게 할 줄 아는 거니?'라며 신기해하시고, 가끔은 '나도 해줄래?'라고 말씀하시곤 해요. 그러면 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한국식 엄마의 조기교육의 힘이죠. 다음에 한국 가면 해드릴게요 "

소주야, 오늘은 내 생일 밥이란다. 네 거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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