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루비 Jun 05. 2023

사랑이 많은 여인

안톤 체호프의 <귀여운 여인>

안톤 체호프의 <귀여운 여인> 표지


 가슴속에 사랑을 많이 담고 있는 게 죄가 될까? 안톤 체호프의 단편 소설 <귀여운 여인>을 읽고 나니 궁금해졌다. 그런데 제목에 ‘귀여운’이라는 단서를 붙인 걸 보니 작가인 안톤 체호프는 나쁘게 보지 않은 것 같다. 소설 속 내용을 살펴봐도 마을 사람들 또한 여주인공 올렌카를 나쁘게 바라보지 않는다. 남편과 두 번이나 사별할 땐 안타까워해주고 새로운 사랑에 빠졌을 땐, 수군댈지언정 귀엽게 바라봐준다.     


“배우들은 그녀를 ‘또 하나의 바니치카’라느니 ‘귀여운 여인’이니 하는 애칭으로 부르며 무척 좋아했다.”

“저 귀여운 것이, 저 가여운 올렌카 세묘노브나가 저렇게 슬퍼하고 있군요!” 이웃들은 성호를 그으면서 말했다.     


 그럼에도 이 소설을 읽고 나서 슬퍼졌던 건, 내가 겪은 20대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단순히 호감을 주고받았을 뿐인데, 온갖 더러운 소문을 부풀려서 퍼뜨렸고, 나는 사정없이 마녀사냥의 대상이 되었다. 제대로 된 연애를 해본 적 없는 나를 손가락질하며 근거 없는 욕설을 퍼부었다. 그렇다고 내가 올렌카처럼 대책 없이 무턱대고 매번 사랑에 빠지는 여자도 아닌데 말이다.     


 소설을 읽는 사람마다 올렌카에 대한 평가가 다를 것이다. 소설 속 올렌카는 사랑하는 남자에게 완벽히 동화되어 간다. 극장 경영주인 쿠킨과의 결혼 생활에서는 오로지 연극과 공연을 찬양하는 말들을 이야기하며 쿠킨과 의견을 같이하여 안목 없는 관객들을 야유한다. 그런데 막상 쿠킨과 사별하고 목재상인 푸스토바로프와 재혼 후에는 이제 관심은 오로지 목재로 옮겨지며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목재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언제 그랬냐는 듯 지난번의 관심의 대상이었던 연극은 시시한 것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두 번째 남편과도 사별하고 수의사와 사랑에 빠졌을 때는 오로지 가축과 그와 관련된 시스템이 관심의 대상이다.      


 올렌카를 바라보니 나도 조금은 그런 모습이 있는 것 같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 사람에 대한 관심도 많아지고 그와 닮아지고 싶어 하는 것 같다. 그것이 때론 주관이 없어 보이기도 한다. 이런 모습을 어떤 독자들은 올렌카가 자기 의견이 없고 주체적이지 못하다고 비판한다. 그래서 나도 뜨끔했다. 하지만 정말 그게 그렇게 잘못된 일인 건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쁜 행동을 하거나 불법을 저지르는 것도 아니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의견에 귀 기울이고 닮아가는 게 비난받을 일인 걸까?  


 수학에서도 전체집합 안에 교집합과 여집합이 있듯이 사랑하는 사이에 교집합을 늘리고 여집합인 부분에서 더욱 자신의 주관을 확고히 다져나가면 되지 않을까? 내가 잘 모르는 부분을 배워가고 내가 잘 아는 부분을 발전시켜 나간다면 상호보완적이 되고 더욱 끈끈한 사랑이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1899년에 쓰인 이 작품은 톨스토이도 극찬하였다고 한다. 사랑에 빠지면 매번 순수한 마음으로 헌신하는 올렌카를 귀엽게 바라보는 마을 주민들도, 작가도 섬세하고 사려 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 올렌카의 사랑은 마지막엔 깊은 모성애로까지 발전한다. 비록 주체적이지 못하고 의존적이라는 비판도 받는 올렌카지만 올렌카는 모성애를 느끼면서 점점 더 독립적이고 자주적인 여인으로 변모해 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들처럼 여기는 샤샤에게 많이 의존하긴 하지만 말이다. 사랑과 집착을 구별하지 못하면 문제가 되겠지만 집착이 아닌 따스한 애정과 사랑은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게 아닌가? 그래서 톨스토이도 이 소설을 극찬한 걸까? 이러한 이유로 안톤 체호프가 이런 작품을 탄생시킨 걸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올렌카 같은 여인을 사랑스럽게 바라봐주는 사람들이 많아지기를 바라며 이 글을 마친다.




이전 19화 하버드 사랑학 수업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