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화)
그날은 신규교사 수업컨설팅이 있는 날이었다. 5년차임에도 불구하고 막내에 속한다는 이유로 억지로 컨설팅에 참여하게 되었다.
'신규교사 취급할 거면서 부장은 왜 준거지?'
일할 때는 부장님 대우를 해주지만, 항상 이런 연수만 있으면 배움이 필요한 신규교사 취급이었다. 모순이었다. 신규교사 범주에 포함된 6년 차 연구부장 형과 투덜투덜 대면서 일말의 기대조차 갖지 않은 채, 수업 컨설팅에 참여했다. 보나 마나 평소처럼 형식적이고 딱딱한 컨설팅일 것이라 생각했다.
회의실에 가보니, 안경을 쓰고 얼굴이 길쭉한 친숙한 외모의 50대 중년 남성분이 와계셨다. 오이가 떠올랐다. 예상대로 별명은 오이쌤이라고 하셨다. 오이쌤은 이런저런 학급경영방법, 수업방법을 나열하기 이전에 29년 동안의 교직 인생을 담담하게 풀어가기 시작했다.
신규교사 시절 겪었던 학급붕괴, 선생님을 그만둬야 할까 고민할 정도의 직업에 대한 회의, 어떤 교사가 좋은 교사일까에 대한 철학적 고민들, 좋은 선생님이 되기 위한 치열한 노력과 성장, 29년 동안 쌓인 본인만의 학급경영·수업 노하우들.
오이쌤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서 교직에 대한 자부심과 열정이 묻어 나왔다. 교직을 단순 직업이 아니라, 천직으로 여기시는 분 같았다. 신규교사 시절의 학급붕괴와 극복, 아이들에게 많은 것들을 해주다 보니 생긴 동료 교사와의 갈등 스토리는 마치 내 얘기를 듣는 것만 같았다. 쉰이 넘는 지금까지도 변함없이 학생들과 영화를 만들고 주말에 아이들과 영화를 보러 가는 등 아이들을 위한 활동을 하는 선생님을 보고 '나도 훗날 저런 선생님이 되고 싶다.'라는 생각을 했다. 승진을 충분히 할 수 있음에도 아이들과 함께 하는 것이 좋아 평교사로 남아계신다는 점도 감동적이었다.
이 선생님이라면 지금 내 고민을 털어놔도 좋을 것 같았다. 나의 마음을 이해주실 거라 생각했다. 조심스럽게 얼마 전에 일진이 되어 찾아온 제자, 민수(가명)의 얘기를 꺼냈다. 이 아이를 어떻게 하면 좋을지, 부모님께 연락을 드리는 건 어떨지 조언을 구했다.
선생님께서는 부모님께 연락을 드리는 방법은 '비추'하셨다. 이미 졸업을 한 아이인데 부모님에게 전화를 해서 아이 교육에 이래라저래라 간섭을 하면 자칫하면 상대방에게 선을 넘는 행위로 인식이 될 수 있다고 하셨다. 대신 다른 리마커블한 사례를 들려주셨다.
선생님의 친구분, A 선생님의 이야기였다. 무려 10년 동안, 도움이 필요한 아이와 꾸준하게 만남을 가지면서 결국에는 아이를 변화시켰다고 했다. 한 아이를 변화시키기 위해, 10년 동안 얼마나 많은 노력과 에너지가 들어갔을까. 얼마나 많은 고민들을 하셨을까. A 선생님에 대한 존경심이 절로 샘솟았다.
"만약에 선생님이 진심으로 이 아이를 도우고 싶다면, 지속적으로 만나서 교화를 시켜보세요."
몇 주를 고민했다. 민수에 대한 나의 마음은 진심인지. 정말 이 친구를 바꿀 자신이 있는 건지. 과연 내가 감당을 할 수 있을런지.
'에라이 모르겠다.'
일단 연락을 해보기로 했다. 설사 큰 도움을 주지는 못하더라도, 가끔씩 만나서 좋은 얘기들을 들려주는 것만으로도 이 아이의 인생에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다.
6월 4일.
카톡을 해보았지만 답장이 없었다. 전화를 해보았지만 받지 않았다. 답신 전화도 없었다.
7월 12일.
다시 카톡을 해보았지만 여전히 답장이 없었다.
7월 13일.
이제야 연락을 받았다. 이번 주 금요일에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다.
7월 14일.
민수에게서 금요일에 못 만날 거 같다는 카톡이 왔다. 방학 때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다.
하필 방학 무렵, 코로나가 심해져서 또 약속을 미루게 되었다.
9월 15일.
다시 만나자는 카톡을 보냈다. 하지만 답장이 없었다. 전화도 받지를 않았다.
10월 6일.
또 한 번 카톡을 보냈다. 이번에는 답장이 왔다. 21일 복싱 대회 이후에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다. 대회가 끝나고 난 뒤, 여유가 될 때 먼저 연락을 주기로 했다. 하지만 민수의 연락은 오지 않았다.
11월 7일.
참다못한 내가 다시 연락을 했다. 하지만 감기를 핑계로 들어 또 못 만나겠다고 했다. 중간에 내 카톡을 읽씹 했다. 하······.
11월 9일.
미루지 말고 약속을 잡자고 했다. 그러자 갑자기 만나기 힘들다고 했다. 소년체전 선발전 때문에 안 된다고 했다. 1달 이상 남았는데? 정말 내가 보기 싫은 건가······. 이쯤 되면 의도적으로 나를 피한다고 봐도 무방했다. 일단 소년체전 선발전이 끝나고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다.
11월 말.
여전히 민수와의 만남은 갖지 못했다. 당시 나는 졸업한 제자인 의찬(가명)이를 가르치는데 온 신경이 쏠려 있었다.
의찬이 담임선생님과 의찬이의 교육에 대해 한창 얘기를 하는 중이었다.
'아, 맞다! 민수도 의찬이랑 같은 학교였지! 의찬이 담임선생님께 민수에 대해 한 번 물어봐야겠다.'
"선생님, 혹시 민수 아세요?"
"으음······. 민수요...? 아, 민수도 00초 나왔죠? 민수 알죠······."
평소와 다르게 선생님의 반응이 뭔가 미적지근했다. 약간 불편해하는 기색도 보였다.
"민수는 요새 어때요?"
"민수는 요새 어때요?"
곧이어 충격적인 선생님의 대답이 나오는데······.
다음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