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실
강현덕
울려고 갔다가
울지 못한 날 있었다
앞서 온 슬픔에
내 슬픔은 밀려나고
그 여자
들썩이던 어깨에
내 눈물까지 주고 온 날
단시조 한 편이 단편소설 한 편 읽은 듯한 감정의 분량을 안겨줍니다. 시인은 울려고 기도실을 찾았습니다. 울고 싶을 때 기도실이 마침맞다는 경험이 있는 성싶은데 그날은 ‘앞서 온 슬픔’이 선점한 분위기에 밀리는 상황입니다. 운다는 것은 슬픔과 고통을 눈물로 씻어내는 행위이지요. 그런데 여기에 참회가 더해진다면 그 눈물은 훨씬 강렬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앞서 온 슬픔’의 눈물이 그런 것으로 보입니다. ‘들썩이던 어깨’의 뒤에서 시인은 ‘내 눈물까지’ 그녀의 눈물에 동참하며 자신의 슬픔을 양보 내지는 무화시킵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을 시인이 그녀의 눈물에 동참했다는 사실입니다.
이 작품은 필자에게 문학의 역할에 대해 한 번 더 되새기게 합니다. 과연 인간의 고통과 슬픔을 환기喚起시키는 시가 가치 있는가? 인간에게 희망을 안겨주는 시가 더 가치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가 논했듯이 인간은 비극을 통해 카타르시스에 이르고, 눈물은 영혼을 정화시킨다고 하죠. 희망 또한 고통 속에서 위안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좋은 의도라 할지라도 참담한 현실을 외면한 희망은 보여주기식일 뿐입니다. 진정한 희망은 고통과 슬픔을 딛고 묵묵히 오는 것입니다.
예전 양반댁 장례 행렬에 곡하던 종을 일컫는 곡비를 시인에 비유하곤 합니다. 그러니까 타인의 눈물에 동참하고, 타인을 대신하여 울어주는 게 시인의 역할이란 거죠. 때에 따라 웃음을 주고 흥을 유발하는 역할을 맡기도 합니다. 위 작품 <기도실>은 자신을 울러 갔다가 시인의 본분으로 곡비가 된 사연을 읊은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