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특급썰렁이 Sep 15. 2024

나의 이생 18

남자중학교 선생님들 (8)

사실은... 지난 "나의 일생 시리즈" 에서 미처 언급하지 못했던 나의 "웅변학원 경력" 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국민학교 6학년 때에 약 3개월 정도 웅변학원에 다녔었던 걸로 기억이 된다. 담임선생님에게서 집에 상담전화가 올 정도로 극내성적이었던 나의 학교 생활을 걱정하시던 아버지와 어머니가 오랜 고심 끝에 끝끝내 웅변학원에 보내는 용단을 내린 것이었다. 공부 관련 학원에는 일절 단 한 푼의 투자조차 하지 않으셨던 어머니가 유일하게 삼남매 모두 보냈던 곳은 진짜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피아노 학원" 이었다. 솔직히 큰누나가 탁구를 관둔 이후로 예체능 자체에 정말 진저리칠만큼 싫어하셨는데, 하필 집 근처에 누가 피아노학원을 개원하면서 고객 확보 아니 소상공인들 간의 품앗이 개념이랄까... 아무튼 피아노를 느닷없이 배우게 되었다. 예상대로 피아노도 젬병이라서, 어린이 바이엘 상권 떼고나서 피아노 쌤과의 즉각적인 협의 끝에... 고작 한 달 만에 즉시 그만두게 된 것이 전부다. 천재적인 피아니스트가 될 것이 아니라면 애저녁에 그런 좋은 싹수가 보이지 않는다면, 굳이 시간과 돈을 들여서 가르칠 필요가 없다는 것이 어머니의 지론이었으니. 나는 글솜씨 외에는 딱히 잘하는 게 없었고, 그나마 꽤 그림을 그리는 편이었으나 역시 "화가로 돈벌어먹고 살기 힘들다" 라는 어머니의 편견에 막혀 애초부터 시작조차 하지 못했었다. 소싯적에 내가 그림 배우게 미술학원 보내달라고 졸랐다가, "남들보다 훨씬 나은 그림을 진짜로 잘 그리는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면 애써 미술학원 안 다녀도, 남들이 그 재능을 알아줘서 얼마든지 그림으로 성공한다. 네가 그 정도가 아니라면, 돈 아깝게 괜히 미술학원 다닐 필요없다!" 하나부터 열까지 다 맞는 얘기이긴 한데, 어린 내가 듣기에는 전부 속상하고 맘 아픈 이야기로밖에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런 어머니가 애써서 보낸 웅변학원이었다. 오죽 했으면... 집에서도 자폐증마냥 방구석에 처박혀서 말없이 책만 읽어대는 내 모습이 그렇게도 싫었나 보다. 나는 그저 가만 앉아서 읽고 싶은 책을 읽는 것이 좋았을 뿐이었다. 어떠한 정신적 육체적 질병도 없었고... 지금 생각해 보면 상당히 심각할 정도로 문자중독이었던지라 단지 글방 선비마냥 책 속에 파묻혀 있는 시간이 많았을 뿐이었다. 심지어 언젠가는 나중에 커서 조그마한 서점을 운영했으면 좋겠다고 희망한 적도 있었다. 아니면 도서관 사서라도. 그러면 내가 좋아하는 책을 하루종일 실컷 읽으면서 평생 살아갈 수 있을테니... 어쨌든 어머니가 어찌 비용을 마련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집에서 약간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어느 웅변학원에 국민학교 6학년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다니게 되었다. 거리가 멀어서인지 웅변학원에서는 봉고차량을 운영했는데, 학원 가는 첫날 그 봉고차를 탔더니만 온통 쬐그만 국민학교 1, 2학년 수준의 아이들이 하나 가득 타고 있는 게 아닌가. 그 아이들은 이미 170센치에 가까울 정도로 키가 큰 내가 봉고차에 탄 것을 매우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기 시작했다. 설마 요런 꼬맹이들만 있는 건 아니겠지. 아니 그건 현실이었다. 웅변학원에는 모조리 국민학교 1~3학년 아이들로 꽉 차 있었다. 그나마 고학년인 3학년도 몇 안 될 정도. 첫 날이라 학원 강사님이 나더러 일어나서 왜 여기 다니게 되었는지와 자기 소개를 모두들에게 해 보라고 하셨다. 나는 당연히 그 많은 동생들 앞에서도 주눅이 들고 긴장한 나머지 버벅거리며 말 끝도 제대로 맺지 못하고 대충 얼버무리고 말았다. 그 순간 그 어린 녀석들은 내가 왜 저 많은 나이에 가리늦까 자기들과 함께 웅변을 배우게 되었는지 담박에 알아채리는 눈치였다. 나는 키만 제일 큰, 웅변학원 제일 꼴찌 신입생이 되어버렸던 것이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