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I

나의 가장 사랑하는 계절.

by 이로하

무라카미 하루키는 냉장고에 오래 머물러 알알이 차게 되어있는 맥주를 마시기 위해 달리기를 한다고 했는데, 더위를 물리치고 찬 맥주를 온전히 즐길 수 있는 계절이 슬슬 지나가고 있다.


여자는 봄을 탄다고 하는데, 나는 실은 가을을 무척이나 타는 편이다.

가을에는 한강으로 자전거를 타고, 산에 올라가 산책을 즐긴다.

바삭해진 낙엽의 냄새와, 깊어진 흙의 향기도 모두 사랑한다.


가을 공기에서 느껴지는 그 바삭한 습도와 바람의 강도, 그것에 밀려오는 흙,

풀의 냄새 같은 것들이 확연히 다르게 다가온다.

또 습한 여름의 느낌을 무척이나 싫어해 손을 연신 붙잡고 연애를 열심히 하는 사람들을 보면

정말 대단들 하다며 너무 신기해하다가도

가을이 되면 이제 내 옆의 공간을 내어줄 용기가 생기는지 연애가 문득 그리워지기도 한다.


이맘 때면 나는 클리쉐 같은 영화들을 찾아보게 된다.

유브갓메일, 뉴욕의 가을, 만추, 비긴 어게인, 냉정과 열정사이 같은 것들 말이다.

신기하게 어떤 영화에서는 꼭 똑같은 장면에서 매번 눈물이 난다.

(참고로 난 완전 T 성향의 사람이다.)




이맘때만 할 수 있는 것들은 또 얼마나 좋은가.


지난겨울 후에 날 기다리던 보드라운 외투들과 질리지 않는 트렌치코트를 맘껏 입을 수 있고,

긴 것과 짧은 기장의 법칙이 외투와 이너웨어에서 무너지는 그런 매치 같은 것도 무조건 허용된다.

다른 계절에는 하기 힘든 것들이 이 계절엔 유독 멋져 보인다.


야장에서 좋아하는 이들과 소주 한잔에 수다를 떨 때면 밤이 더 길었으면 하는 마음만 든다.

이따금 누군가의 손을 잡고 싶어지고, 한강에 앉아서 일렁이는 불빛을 보며 걱정하는 마음을

다 내려놓고 행복한 얘기만 하고 싶어 진다.


하지만 슬프게도 가을은 생각보다 짧아 금방 스쳐 지나간다.

영원하지 않은 건 그래서 더 소중하다.




내년까지 너를 또 어떻게 기다릴까.

그 긴 겨울의 추위와 폐쇄적인 마음을 이겨내면서.

그 긴긴 여름에 잠을 이룰 수 없는 밤들을 세어가며, 장맛비가 얼른 그치기를 기다리면서.


나의 온전한 짝사랑, 가을.

조금만 더 천천히 가주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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