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차차차, 수영모하고 수경을 깜박했습니다요. 나참, 이래 사람이 실수가 많네요. 그게 어디 있습지요?”
(삼국지에 나오는 조조의 내시 목소리를 다시 냈다.)
그리고 연이어 안쪽을 보며 복화술로 이렇게 말한다.
“자넨 말이야. 깜빡 깜빡하는 실수가 많아서 큰일이야! 허허허. 신혼여행 가는데, 신부는 시어머니와 시누이 사이에 맡겨두고 혼자서 비행기를 탈 인물이지! 크허허허. 어서 다시 락커로 들어오게나. 안그러면 10초 이혼당할 걸세!”
(삼국지에 나오는 털보 장비 목소리다.)
어떻습니까 그럴 듯 하죠.
제법인데 하시겠지요들.
근데 복화술은 어려운 거 아닌가 할텐데, 걱정마십시요. 입술을 움직이면서 하는 겁니다.
엥? 그럼 복화술이 아니네 하겠지만.
그건 천만의 만만의 말씀.
탕 안의 저분들에게 등을 돌리고 락카 안쪽에 대고 말하기 때문에, 저분들은 정작 내가 입술을 움직이는지 볼 수가 없다.
요컨대 사기다.
사기면 뭐 어떤가. 좋은데 쓰면 계략이 되고, 전술이 되는 거다.
나는 잽싸게 락커로 들어갔다.
숨어서 욕탕 입구 쪽을 빼꼼히 보니,
“멍.”
아무 변화도, 미동도 없다.
저들은 조조의 내시와 털보 장비가 온 줄 알겠지.
바야흐로 성공이다.
“히, 히.”
이제 옷을 입고 다시 밖으로 나가면 그만. 인생은 이렇게 살면 되지요, 니나노.
라고 생각하는 순간이다.
그때.
고독한 미식가 마츠시게 유타카가.
갑자기 뒤에서 스윽 나타나 엄숙한 목소리로 말한다.
“진정한 미욕가라면 어떤 상황에서도 직업의 소명을 버려선 안되지. 누군가 보고 있지 않을 때, 더욱 말이지. 이건 진정 자네를 버리는 행위야. 그래도 도망치겠나.”
아참. 이 양반.
저기요. 마츠시게 유타카씨.
당신은 먹는 거고, 저는 목욕하는 겁니다. 이건 엄연히 다르죠.
다르지 않나요. 전 일단 벗고 시작하잖아요. 옷 다 벗고 밥 먹어 봤어요.(얘기가 이상한가.)
어쨌든.
게다가 식당에 들어갔는데, 거기가 야쿠자들로 가득한 소굴이라면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실까요.
다꽝(단무지)만 먹어도 체할 걸요.
이렇게 말은 해보지만, 변명으로만 들리기 시작한다.
‘회사 출근을 목욕탕으로 합니다’ 라는 글에도 썼듯이,
이건 미욕가로서의 나를 속이는 행동이고, 부끄러운 행동이라는 거다.
이 하나의 행동으로 쌓아온 명예를 무너뜨리는 것이고, 욕탕들에 대한 배신이라고 생각했다.
고작 조폭들에게 밀려서 목욕탕을 버리고 나온다면 평생 두고두고 후회하지 않을까.
내가 만약 목욕탕을 만든다면, 그 목욕탕은 ‘조폭들이 무서워서 도망치고 만든 목욕탕’이 될 것이다.
아, 아.
게다가 난 어릴 때부터 소명의식과 책임감, 맡은 바 소임을 다해야 한다는 마음이 강한 아이였다.
초등학교때 교실 청소를 할 때면 선생님이 먼지 한톨도 있으면 안된다고 했다.
그래서 끝까지 남아 먼지를 제거했다.
“이김정! 아직도 청소하니?”
“선생님! 먼지가 1,563개의 톨이 아직도 남아있습니다. 제가 다 세고 다니니... 아니, 선생님 옷에서 방금 먼지 12개 톨이 떨어졌습니다. 난감한데요. 그치만 걱정마십시오. 지금까지 16만 4천 2백개의 먼지 톨을 없앴는데, 이까짓것쯤.”
“저기요. 이김정 아저씨...하아 참.”
나는 저놈들에게 맞아 죽는 한이 있더라도 목욕탕 조사를 해야 한다고 의지를 굳혔다.
그래서.
다시 욕탕으로 들어갔다.
(근데 이게 뭔가 쫌 불안불안 하죠. 저도 그렇습니다.)
욕탕 문을 드르륵 열고 안으로 발을 들였다.
일단 발을 들인 사람은 조조의 내시 쪽으로 하기로 했다.
복화술 수습은 해야하니까.
내가 또 개연성이라면 놓치지 않고 주섬주섬 잘 주어담고 다닌다.
해서 이렇게 알리바이를 꾸몄다.
“아참. 여기는 목욕탕입죠. 수영모와 수경은 필요없겠습니다요. 근데요. 샌님은 세달동안 목욕도 안하고, 샤워도 안하고, 때가 덕지덕지 붙었는데, 여기에 들어오면 에티켓이 아니옵니다. 그러니 집에서 초벌로 좀 닦고 오시지요.”
“크허허허! 바로 목욕을 꼭 하고 싶었는데, 자네 말을 듣고보니 맞는 말일세. 그렇게 따르도록 하지! 다시 갔다 오겠네. 크허허허!”
그렇게 수습하고 안으로 혼자 들어가니.
조폭들은 목욕을 하느라 여념없었다. 나같은 건 일도 신경쓰지 않는 눈치였다.
걱정도 팔자라고, 역시 뭐든 부딪히고 볼 일인 것 같다.
별 탈 없다 생각하니 심장도 요동을 멈추고, 마음도 차분해졌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기분.
지금까지 걸어온 길이 천리, 만리, 구절양장의 험한 길이었지만 느긋하게 요산요수의 풍광이나 즐기련다.
해선 난 천천히 본업에 충실하기로 했다.
원래 하던 것처럼 목욕탕 조사를 했다.
샤워기, 용품, 사우나실, 세신실, 수질, 수압, 공조, 조명, 인테리어 등등.
거의 마무리되자, 탕으로 향했다.
온탕에는 보스가 혼자 들어가 있었다.
덩치가 산만하다.
“실례좀.” 하고.
살그머니 들어갔다.
물이라도 튀면 시비가 걸릴 게 틀림없으니까.
어쨌든 여기까지는 여느 목욕탕 체험처럼 흘러간 거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이상하다.
어느 순간부터 뭔가 걸떡지근했다.
계속 탕 조사를 하느라 바빠서 주위에 신경쓰지 않은 탓도 있다.
그런데 어느 시점부터 공기가 달라진 기분이다. 공기의 흐름도 다르고 감촉도 달라졌다.
뭘까.
뭐가 다르지.
그제서야 나는 주위를 도리도리 둘러보았다.
온탕에는 보스와 나, 단둘이 탕에 들어가있었다.
이건 이미 알고 있었고.
그럼, 다른 조폭들은 어디에 있는 걸까?
생각해보니 그들을 샤워기에서도, 사우나에서도, 세신실에서도, 여기 온탕에서도 만난 적이 없는 거다.
처음 들어왔을 때 그 많던 조폭들은 대체 이 좁은 탕 어디에 있는 걸까.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조폭들이 열탕과 냉탕 사이에 죄다 모여있는 게 아닌가.
무슨 예비군 훈련 나온 것처럼 말이다.
자세히 보니 행동대장처럼 보이는 놈이 부하들에게 뭐라뭐라 설명하더니, 큰소리로 이렇게 지시를 내렸다.
“냉탕!”
냉탕?
냉탕이 뭐 어쨌다고.
그랬더니 우르르르 몰려간다. 냉탕으로.
뭐지?
부하들이 얼음장처럼 차가운 냉탕으로 우르르 들어가는 거다.
저 좁은 탕에 열댓명이 들어가니 아닌 말로 마치 콩나물 시루같다.
출근 길 2호선 지하철 안 같다.
그들은 그 안에서 목만 내밀고 있었다.
실온에 있다가 냉탕을 저런 식으로 들어가면 매우 차다.
거기다 땃땃한 김으로 데펴진 탕에 서있다가 들어간 거다.
“끼오오오.” 하고 비명을 지르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다.
심장마비 걸릴 수도 있다.
근데.
침묵.
헉!
다들 참고 있는 것이다.
왜들 저러지?
잠시후.
“튀어!”
그랬더니 우르르르 튀어나왔다.
저게 뭔 지랄이야.
숨돌릴 틈도 없이 이런 소리가 다시 들린다.
“열탕!”
열탕?
이번엔 우르르르 열탕으로 들어갔다.
출근 길 2호선 지하철 속으로.
목만 내밀고.
정말 지랄하고 자빠졌다.
그걸 온탕에서 보스가 흐뭇하게 쳐다보고 있는 거고.
이건 대체 뭘까.
뭐하는 작태일까.
아무래도 극기, 담력 훈련인 것 같다.
조폭들이 한겨울에 지리산 같은 데에 가서 얼음을 깨고 계곡물에 몸을 담그며 담력을 키우고 하듯이 심신을 단련시키는 게 아닐까.
목욕탕에서 말이다.
난생 처음 보는 장면이었다.
이런 걸 목욕탕에서 할 줄이야.
저들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이해되는 부분도 없지않아 있다.
목욕도 하면서 극기훈련도 하자 일 것이다.
일석이조다. 꿩 먹고 알 먹고.
저녁에는 바쁘실테니까.
게다가 전세버스를 대절할 돈도 없는 영세한 조폭이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지리산이나 설악산 갈 돈도 없다니, 측은해지는 것도 좀 있다.
그렇지만 내 입장에서는 슬슬 화가 치밀었다.
왜냐면 아무리 그래도 신성한 목욕탕을 조폭의 심신 단련 공간으로 사용하는 건 이해할 수 없다.
아무리 돈이 없기로서니.
안그렇습니까. 마츠시게 유타카씨.
당신도 만약 식당에 들어갔는데 밥을 시켜놓고 그건 먹지 않고, 뜨거운 밥에 손을 집어넣었다 뺐다 하며 공수도를 단련하면 기분 좋겠어요.
이게 식당인지, 차력쇼인지.
미식에 대한 모욕 아닐까요.
그럼 이것도 미욕에 대한 모욕입니다. 그렇죠.
난 목욕을 끝내고 락카로 나와 옷을 입고나서도 분을 삼키지 못했다.
“씩, 씩.”
이대로 모른 척하고 나갈 것인가.
아니다.
그럴 수 없다.
난 고독한 미욕가이다.
소명의식 충만한 사람이다.
먼지 톨이 1,563개이다.
그래서 이렇게 탕을 향해 나도 모르게 소리쳤다. (이게 과연 잘하는 짓인지 모르겠지만)
“샌님 벌써 오셨습니까요. 초벌 샤워는 하셨겠지요.” (조조의 내시 목소리)
“크허허허! 그럼 했지! 이렇게 돌아오지 않았나! 자네는 목욕 다했나.” (다시 나온 털보 장비 목소리)
“네. 다했습니다. 샌님!”
“근데 말이야. 곰곰이 생각해보니. 내가 문제가 아니고 자네가 더 문제 아닌가!”
“제가요?”
“맞네. 자네가 문제야! 나야 때가 좀 많다뿐이지, 자네는 피부병이 장난 아닌데, 여기서 목욕을 하면 안되지. 습진에, 악성 무좀은 기본이고, 아토피에 대상포진까지 최근에 발병했다며.”
“아이고. 어떻게 아셨습니까요. 샌님. 겉으로는 멀쩡해보일텐데.”
“내 눈은 못속이지. 눈병도 있고, 피부염 때문에 비듬도 장난 아니고, 이게 악성이라 죄다 옮는다는데. 게다가 자네 몸에 이도 있고, 빈대도 데리고 다닌다는데, 여기 목욕탕에 죄다 풀어놓고 나온 셈이군. 사장이 불쌍하네. 크허허허! 고로 나는 여기서 목욕안하고 저 길 건너 찜질방으로 갈 셈이네. 여기 목욕탕 영업은 볼장 다본 셈이지. 크허허허! 참, 코로나도 걸렸다던데 맞나?”
“콜록, 콜록. 그것까지 아시니 제가 손들었습니다요. 실은 폐병도 있습니다요. 콜록콜록. 어제는 피가 목구멍에서 500씨씨 정도 울컥 나와서 그걸 받아다가 다시 마셨지 뭡니까. 샌님.”
“으웩. 참 통이 크네. 크허허허!”
털보 장비의 말이 끝나자마자.
몇초뒤 보스를 선두로 조폭들이 우르르 튀어나왔다.
다들 몸 어딘가가 가려운지 긁고 있고, 콜록콜록대는 놈도 있고, 망연자실하는 놈도 있고, 가관이 아니다.
찝찝해서 죽겠지요들.
이제 목욕탕은 얼씬도 안하겠구만.
그런데 막 옷을 입으려던 그들중 얼굴에 흉터가 세로로 좌악 난 놈이 째진 눈으로 나를 빤히 보았다.
아까 행동대장 같다.
뭘 보냐, 이놈아.
근데.
갸우뚱한다.
뭔가 이상하다는 거다.
뭐! 뭐 말이야!
잠시후 뜬금없는 질문을 내게 던졌다.
“그런데 당신 말이야.”
“네? 왜 그러시렵니까.”
얼굴색 안변하고 뻔뻔하게 대답해준다.
제깐 게 뭐가 이상하겠어. 내 완벽한 알리바이에 어디 틈이라도 있나요.
“당신 샌님이라는 크허허허 하고 웃어대는 녀석은.”
응. 털보 장비. 삼국지에 나오잖아. 흉터 바보야.
“대체 어디 있지?”
대체 어디있냐고.
어디겠어 삼국지지.
그렇게 궁금했어. 아잉.
이 아니고.
어딨냐고?
헉!
그러게. 어디 있지 라고 물어보신다면.
어디지요.
이건 생각안해뒀는뎁쇼.
이러자 한창 옷을 입으려던 다른 조폭들이 동작을 멈추고, “그러게?” 하며 내게 눈이 쏠렸다.
그 눈초리가 화살이 되어 1만발이 내 몸에 꽂혔다.
“파바바바박!”
들켰나.
들킨 걸까.
들켰네.
나 이런.
큰일이다.
갑자기 수전증이 생긴다.
덜덜덜.
그렇지만 떨지말고 일단.
“저기 화장실에서 똥누러 갔는댑시요.”
설마 화장실까지 찾아겠어.
“화장실? 야! 너 찾아봐!”
화장실까지 찾아가네. 제길.
지체없이 밑에 부하가 간다.
“네!”
이거 진짜.
뭐됐습니다.
정말로 눈치 챈 모양입니다.
저 어쩌죠.
일파만파다.
부하가 화장실을 향해 저벅저벅 걸어갔다.
안돼요! 안돼!
내가 거짓말한 것이 들키면 어떻게 될까.
조폭들을 희롱한 죄로 살아남지 못하겠지.
심장이 두근반 세근반이다.
요동은 더욱 심해진다.
다리가 후덜덜 떨려왔다.
이 와중에 본능에 충실했다.
난 떨리는 손을 주머니 속에 넣어 휴대폰을 조작했다.
어서.
머릿속으로 휴대폰을 켰을 때 통화버튼 위치를 가늠했다.
눌렀다.
“띵, 띵, 띠, 띠딩.”
번호 자판이 나왔을 것이다.
1번과 2번 위치를 생각해본다.
여기 어디지, 아마.
112 번호를 미리 눌러두고, 여차하면 통화를 누를 셈이다.
이건 목숨이 달린 문제다.
잘 짚어야 한다.
이 버튼이 맞아야 할텐데.
그걸 난 안보고 손가락으로만 하고 있다.
주머니 속에서 꼼지락거리며.
그때다.
흉터 놈이 째진 눈으로 나를 잡아먹을 듯 봤다.
“야! 너 주머니에서 손 빼라. 존만아.”
“네, 네?”
으.
난 죽었다.
부하는 이미 화장실 앞에 서서 문 손잡이를 잡아 “트드득” 돌렸다.
저걸 열고 안으로 들어가면, 내 거짓말이 발각되는 건 불 보듯 뻔한 일.
아이고. 하느님.
어느 신에게 빌어야 이 위기를 모면할 수 있겠나이까.
알라신. 부처님. 보살님. 조로아스터님. 아니면 클레오파트라.
누구, 누구.
아무나 대 봐.
괜히 소명의식에 젖어 안해도 될 짓을 한 결과이다.
언젠가 결국 걸릴 줄 알았지만 지금이 될 줄은.
꼬리가 길면 잡힌다더니.
흑흑.
부하가 화장실 문을 “삐거걱” 열었다.
안을 보더니 부하가 놀란 눈을 했다.
결국 알았네. 알았어.
단념했다. 포기했다. 이제 내 목숨은 이들에게 맡기자. 설마 죽이기야 하겠나.
암매장 정도 당하겠지.
토막토막 잘리든지.
아이고야. 죽었네!
많이 아플 거야.
진통제라도 상비약으로 갖고 다닐걸 후회했다.
으아악!
안돼!
그래도 여기서 생을 마감하는 건 억울해!
우리나라가 월드컵에 다시 4강 가는 건 보고 죽어야.
아니고야.
헌데 문을 연 화장실 안에서 검은 형체가 튀어나왔다.
누구지?
설마 털보 장비?
그건 가상의 인물인데요.
“이 간나새끼래. 어디 화장실 문을 열고 그러네!”
엥?
이 목소린?
아니, 화장실에서 이북 할머니가 튀어나오질 않는가.
아니 왜 저분이 저기서 튀어나오지.
부하가 눈이 동그래져 할머니를 쳐다봤다.
“야! 새끼야. 뭘 보네. 니도 내 미모 알아보네. 내래 송도 절세 미인이야. 참. 저기 서있는 게 개철이 아니네. 저 종간나 새끼래 오랜만에 다 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