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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 율리시즈 Jun 03. 2017

이미지와 이야기: 다이애나 비의 사진 한장

런던 에세이

 다이애나 비의 타지 마할 사진.  1992년. www.guardian.co.uk

바야흐로 인터넷 시대다.

이 시대는 ‘문자(Letter)’의 시대가 저물고 ‘이미지(Image)’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한장의 사진이나 그림이 천 마디의 말이나 글보다 효과적으로 ‘메시지나 감정’을 전달할 수 있다. 페북이나 인스타그램 등이 이미지 시대의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빨리 그리고 쉽게’를 원하는 시대는 문자보단 이미지가 걸맞다.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이 두터운 분량의 소설을 인내하며 읽을까?

2016년 4월 24년전의 사진 한장이 다른 정치 경제 기사들과 나란히 영국 신문들의 톱 페이지를 차지하고 있었다. 단 한장의 사진이 한번에 독자들을 24년전의 기억속으로 데려갔다. 한장의 사진이 수만명의 기억을 되살려 내다니... 이미지의 대단한 위력이다.

이 한장의 사진은 인도의 타지 마할(Taj Mahal)앞 벤치에 수줍은 듯, 예의 다소곳이 앉아 있는 다이애나 비의 모습을 담고 있다. 이 사진은 남편인 찰스 황태자와의 불화와 뒤이은 이혼의 전초를 보여줬다고 해석이 붙여졌다. 만약 다이애나 비의 박물관이 세워진다면 이 사진은 반드시 그곳에 걸려질 것이다. 남편없이 홀로, 그것도 다른 곳도 아닌 ‘지고한 사랑의 대명사’격인 이 아름다운 건축물 앞에 쓸쓸히 앉아 있는 그녀의 모습이 사랑의 위대함과 처량함을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는듯하다. 타지 마할로 상징되는 영원한 사랑을 배경으로 깨어져가는 사랑을 잡으려는 다이애나 비가 대조되어 슬픔을 가득히 자아내는, 미디어가 갖다붙인 그럴듯한 해석과 더불어, 그저 옆에 앉아 위로해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사진이다. 그래서 이 사진은 영국인들의 가슴에 반향을 일으키고 깊숙히 각인되어 있었다.

타지 마할은 인도 무굴 제국 ‘샤 자한(Shah Jahan)’ 황제가 가장 아끼던 페르시아 출신의 왕비 ‘뭄타즈 마할(Mumtaz Mahal)’의 죽음(산고끝에 죽은)을 슬퍼하며 지어 올린 무굴 제국 또는 이슬람 최고의 건축물 중 하나이다. 누구나 감탄할 우아한 곡선미가 돋보이는 건축에다 지고한 사랑이야기가 덧붙여졌으니 더할 나위가 있으랴. 17세기 중기(1631년)부터, 장장 22년에 걸쳐 하얀 대리석으로 지어진 타지 마할은 무려 2만명의 인원이 동원됐고, 코끼리를 이용해 100마일 떨어진 곳으로부터 대리석을 옮겨왔다고 한다. 사랑의 힘일까? 아니, 한 사람의 사랑을 위해 2만명의 인원이 동원되고 22년간 지어졌다니! 이건 착취가 아닌가? 그런 윤리적인 문제를 제고하더라도, 만약에 이 무갈 황제와 그가 사랑한 왕비에 대한 지고지순한 순정이야기를 빼버린다면, 타지 마할은 그저 아름다운 건축물밖에 되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아름다움에는 뒷 이야기(narrative/story)가 항상 따라붙게 마련이다. 황제와 왕비의 사랑이야기가 있었기에, 그것이 행복하든 슬프든, 이 건축물의 아름다움과 유명세에 또다른 가치와 볼거리를 더해주고 사람들은 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여행가이드는 이 사랑이야기를 시처럼 관광객들에게 낭송할 것이다.

이와 더불어, 만약에 다이애나 비가 그저 평범한 여성이었다면, 이 사진 한장이 사람들에게 그런 반향과 감정을 일으킬까? 그녀의 유명세와 더불어 겪은 찰스 황태자와의, 말도 많고 탈도 많던, 별거와 결별이란 안타까운 이야기가 따라주지 않았다면, 바로 지고한 사랑의 심볼인, 타지 마할 앞에 수줍게 앉아있는 그녀의 사진 한장이 그렇게도 사람들 마음을 움직였을까? 즉, 이 한장의 사진이 여느 사진과 다른 것은 사진뒤에 숨어있는 이야기때문일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사진을 본다는 것은 사진을 읽어낸다는, 즉 해석한다는 말이다. 이 사진의 해석은 미디어가 처음했고 사진을 대했던 독자는 여과없이 그 밑에 붙은 설명에 따라 사진을 응시했다. ‘에고 불쌍한지고...,’ 하면서.

미디어는 가끔 과장 해석하기를 좋아한다. 사실, 파파라치가 쉴새없이 따라다녔던 다이애나 비였는데, 특히 이런 외국 국빈 방문은 그녀를 그냥 혼자 타지 마할 앞 벤치에 조용히 앉아 망가져가는 사랑과 결혼에 대한 상심할 여유마저 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 주위에 카메라를 든 벌떼같이 윙윙대던 기자나 관광객들이 일거수 일투족 그녀를 cctv처럼 보고있는데 어떻게 편안하게 앉아 있을 수 있을까? 이 사진은 일상의  tv에서 보는 것처럼 사진기자들을 위한 ‘포즈’였다. 단 몇분도 채 안되는… 또, 24년 후, 이곳을 방문한 그녀의 아들 윌리엄 왕자와 아내 캐서린도 그녀와 똑같았다. 사람들은 '제한선 밖'에서 그들을 바라보고 '제한선 안'에서 그들은 연기자처럼 둘이서 담소하며 카메라를 향해 포즈도 잡아 주었다. ‘우리 사랑엔 변함이 없어요’하는 포즈를 말이다. 사진을 보는 사람들은 제한선 밖, 즉 사진틀 밖도 볼수 있을까? 그래서 이 쓸쓸한 다이애나 비의 사진은 미디아, 즉 우리가 해석하고픈 해석이 덧붙여진 사진이다. 그리고 뒤따라온 그녀의 결별과 이혼에 짜맞추어 '재미있게' 또 '관심을 끌게' 다시 재해석의 살을 붙였다. 재미없는 이야기는 금방 잊혀져 버린다. 어떤 기사는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사진이라고 했다. 과장도 참… 사진기자들을 위해 잠시 앉아 포즈를 취했는데, 결국 우리는 미디어가 해석한 사진을 일방통행으로 대했고 그렇게 그녀에 대한 동정에 자연히 동참했다. 그렇게 다이애나 비는 하나의 전설이 되어버렸다.

프랑스의 개신교 신학자인 ‘자크 엘룰(Jacque Ellul)’은 테크놀로지의 시대와 함께 문자의 시대가 곧 마감하고 이미지의 시대가 도래함을 몇 십년 전에 벌써 예언(?)하였다. 이에 덧붙여 기술의 시대에 ‘프로파간다(propaganda. 선전, 특히 자본주의 사회의 광고)’에 대한 특별한 통찰과 선견지명이 있었던 신학자였다. 이 다이애나 비의 연출된 사진 한장에 열광하는 것도 우리가 이 정교하게 짜여 돌아가는 프로파간다 시스템에 속하기 때문이다. 프로파간다는 이데올로기, 특히 공산주의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사진이나 그림은 포스터와 마찬가지로 상징성을 내포한다.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이다. 특히, 앞서 봤듯이 ‘이야기(Narrative/story)’가 없는 이미지 즉 사진이나 그림은 그렇게 큰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다. 이야기가 붙어야 날개를 달아 나를 수 있다. 이미지가 전달하는 본질은 사실 ‘이야기’다. 다른 말로, 이미지 자체가 하나의 이야기란 뜻이다. 빅토리아 시데 미술 비평가인 ‘러스킨’은 건축물이 스스로  ‘말’을 한다고 했다. 타지 마할도 사실 그 황제와 왕비의 사랑이야기를 끊임없이 들려주는 것이다. 건축이나 미술도 이야기가 없으면 영혼이 없는 죽은 예술이다.

하여튼, 다이애나 비는 비명횡사로 안타깝게 갔다. 40대도 채 되지않은 젊은 나이에 말이다. 그래서 영국인들은 그녀의 아들에게 도를 넘는 애착을 보이는가 보다. 그들에겐 윌리엄과 해리 왕자를 보면 다이애나 비가 저절로 떠오를 것이다. 다이애나 비가 그토록 원했던 영국 국민의 가슴에 남는 여왕으로서 말이다. ‘다이애나의 벤치’로 별명이 붙었다는 그 타지 마할이 보이는 정면 벤치에 24년 후 윌리엄 왕자는 아내 케서린과 함께 나란히 앉아 포즈를 취했다. 캐서린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다이애나와 같은 포즈를 취했다. 신문은 이를 언급하며 그녀를 기념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정숙한 왕실여인의 앉는 모습은 다같지 않은가? 호들갑이고 해석도 갖다붙이기 나름이다. 하늘에 있는 다이애나 비가 이들을 보고 행복해 할거라는 코멘트를 단 신문도 있었다. 상상을 기사화했다. 분명한 사실은, 앞에 우르르 모인 사진기자들을 위해서 이들은 포즈를 취했을 뿐이다. 그것도 단 몇분 동안만. 그 자리에 앉았던 엄마를 생각할 시간이나 있었을까? 그러고 보면, 미디아가 전송한 이미지 만으로만 우리가 접한 왕실 가족들이, 사실은 미디어가 창조하고 조작한 이미지들 일지 모른다. 이미지에 이야기를 덧붙인 것이다. 해석을 붙여 그에 맞게 짜맞춘 연극일지도 모른다. 왕자와 그의 아내가 다이애나 비의 바로 그 자리에 앉은 사진으로 미디어는 또 하나의 이미지를 연출했고 이야기를 창조했다. 사람들은 보도된 사진을 보며 그의 어머니, 다이애나 비를 그대로 연결시키고 기억할 것이다. BBC는 친절하게 이 두 사진을 대조하며 보여주었다. 타지 마할을 방문하는 관광객들은 이 사진을 기억하고 흉내내며 사진을 찍을 것이고 그 이야기를 확대 재생산할 것이다. 여행가이드는 이 흥미로운 이야기를 빼놓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사진과 그에 덧붙여진 이야기는 이제 하나의 '상품'이 되었다. 이게 '프로파간다'이며 그 시스템이다.

사진은 한장이지만 많은 것을 ‘말’한다. 이미지의 시대이지만 이야기가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자크 엘룰의 암울한 예언처럼 문자는 죽지 않고 그저 형태를 바꿔 이미지로 나타나 활동한다. 자크 엘룰은 그림(picture)의 승리라고 단언했지만 알고보면 이미지도 넒은 의미에서의 상징문자이므로 사실 변한 건없다. 형식이 바뀌었지 속은 바뀌지 않았다. 중심은 이야기다. 엘룰은 이 이야기에 열광하는 ‘인간본성(human nature)’을 왜 보지못했을까? 인간이 사회를 이루어 존재하는 한 이야기는 계속된다… 새로운 이야기는 계속 창조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진실이든 거짓이든간에. 문제는 거짓도 진실로 믿어버리는 우매함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다. 이것이 ‘프로파간다’의 위력(power)이다. 자크 엘룰은 이걸 걱정한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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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캠브리지 공작과 그의 부인 캐서린 공작부인. 2016년. www.guardian.co.uk
반면에 나쁜 사람이 되어버린 찰스 왕세자. www.telegraph.co.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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