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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 율리시즈 Jun 10. 2017

보티첼리는 왜?

예술사-보티첼리의 '신비로운 성탄'-구원과 종말의 신학적 메시지

보티첼리의 '신비로운 성탄'

영국에선 크리스마스 시기전에 우리의 연하장처럼 성탄카드 보내는 풍습이 있습니다. 어떤이는 대림절(Advent)이 시작되는 주, 즉 성탄 4주전부터 벌써부터 카드를 준비하지요. 그동안 연락못했던 지인들에게 안부도 묻고 연락할수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성탄 카드를 받으면 크리스마스가 곧 다가옴을 느끼며 몸도 마음도 덩달아 크리스마스에 대한 기대로 증폭됩니다. 1년에 한번인,  크리스마스는 가톨릭 신자나 성공회 신자뿐 아니라 모든 이에게 특별한 기간입니다. 성탄 카드는 꽤나 여러 종류가 있지만, 그리스도인은 대게 전통적으로 르네상스나 바로크풍의 ‘예수성탄(The Nativity)’ 성화를 프린트한 카드를 고르고 또 받습니다. 이 중에 빠지지 않는 것이 산드로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 1445 – 1510)의 ‘신비의 예수성탄(The Mystic Nativity)’이라는 성화입니다. 그는 피렌체 출신의 이탈리아 초기 르네상스 화가이며 ‘프리마베라(Primavera. 1482)’나 ‘비너스의 탄생(The Birth of Venus. 1485)’같은 그의 명화를 본다면 누구나 다 ‘아, 이 그림!’ 할 정도로 많이 알려진 화가입니다.


이 ‘신비로운 성탄’은 다른 ‘예수탄생’ 성화와 비교해 ‘비슷해 보이지만 다른’ 그림입니다. 특히 이 그림에는 여러 상징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고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한폭에 다 담겨 있죠. 미술이 예술 장르로서의 장점은 문학 또는 음악과 달리 한폭의 화면에 ‘시공’을 초월해 다 표현할 수 있다는 장점입니다. 시나 소설에선 한 단락이나 몇 페이지 또는 한권의 책으로 길게 표현해야할 것을 미술은 한폭에 오롯이 담아버립니다. 또 음악은 시간의 예술이며 시간에 제약을 받습니다. 프랑스의 신학자 ‘자끄 엘를(Jacque Ellul)이 몇십년 전에 예견한대로 문자의 시대는 저물고 이제 다시 ‘그림의 시대’가 온것 같습니다. ‘이모지’의 사용이나 인스타그램, 셀피, 또는 유튜브의 인기가 이를 증명합니다. 한 장의 사진/그림으로 가장 효과적으로 소통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그림/미술의 힘이 있는 것입니다.


하여튼, 런던의 ‘내셔널 갤러리’에 있는 보티첼리의 이 그림은 첫째로 그가 르네상스 화가로 원근법(perspective)이나 비례(proportion)의 법칙을 알았고 그 법칙에 따라 여러 그림을 그렸지만 이 그림에선 그 법칙이 거의 무시된다는 사실입니다. 먼저 이 그림의 중심에 아기 예수와 성모님, 그리고 성 요셉이 차지하고 있죠. 아기 예수는 바닥의 자리보 위에 아무런 옷도 걸치지 않고 있습니다. 중세의 예수성탄 그림에는 대부분이 긴 헝겊으로, 즉 죽은 시체를 감싸는 헝겊인 ‘수의’로 아기 몸을 감싸고 있습니다. 이는 구세주의 탄생과 동시에 십자가의 죽음을 상징했기에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나 후기에, 특히 스웨덴의 브리지트 성인의 비전(vision)과 이 비전에 따른 그녀의 기록은 르네상스 화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녀의 기록에 따라, 메시아인 아기 예수가 ‘신’인 동시에 ‘인간’임을 보여주기 위해 화가들은 아무런 옷을 걸치지 않는 아기 예수를 즐겨 그렸습니다. 그래서 이상하지만 벗은 아기와 안벗은 아기를 통해 미술의 시기를 구분도 하지요.



위에서 말했다시피 보티첼리는 비례를 무시했는데 여기선 이 중앙의 세 사람이 비례상 가장 큰 반면(중요성을 암시)에 양쪽으로 왼쪽의 세 동방박사들과 오른쪽의 목동들은 중심인물에 비해 현저히 작아 보입니다. 또 주목할 점은 이 동방박사들이 각자가 가지고 온 선물을 들고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선물을 잃어 버렸을까요? 아니면 어디다 숨겼을까요? 전통적으로 마태오 복음서에 기록된(마태오 2:1-12) 예수 탄생에 의하면, 이 동방박사들은 각각 유향, 몰약, 황금( Frankincense, Myrrh, and Gold)을 갓 태어난 아기 예수에게 바칩니다. 화가들도 충실히 이에 따라 이 값비싼 선물들을 그렸습니다.



동방박사들의 선물만 빼면, 이 그림은 전통적인 예수성탄 성화의 기본요소도 충실히 따르고 있습니다. 구약의 예언서인 ‘이사야 서’에 의한 당나귀와 소가 보이며 구유가 있는 동굴 앞이 배경입니다. 또 메시아의 탄생이기에 전통적 성탄 그림에서 매번 등장하는 허물어진(ruin) 집이나 성이 나오는데 이는 구약을 뜻하며 이제 구약(옛 집)은 가고 메시아인 예수님의 오심으로 신약(새 집)이 도래했음을 암시했습니다. 또, 전통적으로 성 요셉은 성모님에 비해 아주 머리가 훤히 벗겨진 노인으로 묘사했으며 대신에 성모님은 거의 사춘기 소녀의 모습으로 그렸지요. 이는 이들이 보통의 부부가 아니라는 것이고 ‘동정녀 마리아’를 강조하기위한 것이었습니다. 이에 덧붙여 예수탄생 성화에서 성 요셉은 거의 행복한 모습이 안보이며 보통 앉아서 고개를 돌리거나 무릅위로 얼굴을 파묻는 모습으로 많이 표현했습니다.


그림의 위로, 즉 지붕위로는, 우리나라의 강강수월래처럼 천사 12명이 원을 이루며 천상의 춤을 추고있습니다. 그 위로 천상의 골든 돔(golden dome)이 보입니다. 12 천사들의 띠에 쓴 글씨는(육안으로 읽기 힘들지만) 12가지 성모님의 특전(12 privileges of the Virgin)을 표시하고 있습니다. 자세히 보지않아도 이 춤추는 천사들은 보티첼리의 유명한 그림인 ‘프리마베라(Primavera)’에 나오는 ‘세 은총(three graces)’과 아주 닮았습니다. 그림의 앞부분 양쪽으로는 악인들이 어두운 영원의 동굴(지옥)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보이는데 그림의 많은 부분인 중앙과 상단부분에 천상의 음악에 맟춰 춤추는 천사들과 희망적인 메시아의 탄생 모습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죠. 이 악마의 표현은 북유럽 특히 독일의 목판화(woodcut)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그림 중앙의 글씨는 ‘선량한 지상의 모든이에게 평화(peace on earth to men of goodwill)’라고 적혀있어서 메시아의 탄생을 기리며 희망을 얘기합니다. 그리고 아기 예수가 태어난 집 지붕 바로위는 세 천사가 보이는데 이는 ‘믿음, 사랑 그리고 희망’의 신학적 덕목을 각 천사들이 입은 옷의 다른 색깔로 표시합니다. 땅위로는 또다른 세 명의 천사가 각각 세 명의 인간들을 포옹하고있는데 마치 천상과 지상의 만남, 즉 선과 악의 조우, 즉 화해(reconciliation)를 뜻하는 듯합니다. 마치 하느님의 사랑에 의해 천사들이 인간을 천상으로 들어 올리는 듯한 동작을 취하고 있지요.


그런데 왜 이 그림을 ‘신비(Mystic)의 예수탄생(the Nativity)’이라 했을까요? 이것은 이 그림안에 여러 상징들이 들어있고 또 ‘첫번째 구세주의 오심(예수탄생. The Nativity)’뿐 아니라 ‘두번째의 메시아의 재림(the Second Coming)’도 포함한다는 것에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신학에서 말하는 구원과 종말을 표현하기 위함이지요.



이는 또 과거와 미래를 한폭에 동시에 보여줍니다. 이것은 시간을 역사적(Historical)이나 연대기적(Chronological)이 아닌 공시적(Synchronic)으로 보여준 것입니다. 이 그림이 그려진 시기인 1500년은 도미니코회 수도사제였던 ‘제롤라모 사보나롤라(Gerolamo Savonarola)’가 이단으로 1498년 장작더미위에서 처형된지 2년밖에 안된 시기입니다. 보티첼리는 이 사보나롤라의 신학과 강론에 깊이 심취해 그를 추종했으며 끝내는 그림까지 포기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심지어 그가 그린 그림들을 이 피렌체의 광장에 불태우기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이 그림에선 이 사보나롤라가 주창한 엄격한 ‘윤리주의’와 ‘말세 구원적인’ 신학이 자연히 녹아있습니다.



유럽에서 가장 부유하고 활기 넘치던 예술의 중심 도시 피렌체의 윤리적 타락에 크게 상심한 사보나롤라는 피렌체의 산 마르코 수도원(수도사 화가 프라 안젤리코가 살았고 그의 벽화가 남아 있는)에 오자마자 개혁을 단행합니다. 이 개혁은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 몇십년 전이란 걸 보면 몇 역사가들은 그의 개혁이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에 영향을 주었다고도 합니다. 이 화려하고 부유한 도시의 대성당에서 물질만능에 심취한 타락한 도시인의 허영을 질타하는 그의 강론을 들으려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고 합니다. 특히 그가 활동한 시기는 동시에 도시국가 피렌체가 정치적 위험에 빠졌을 때였고 특히 그가 수도사였을 뿐 아니라 빼어난 정치적 지력가로, 기회를 잡을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마침 강력한 프랑스의 만명 군대가 1494년에 이탈리아에 진군했을 때 피렌체를 점령 못하도록 프랑스 왕을 설득했고 또  성공함으로 더욱 더 그의 인기는 하늘로 치솟았습니다. 이후로도 계속된 ‘이탈리아 전쟁(1494 – 1498)으로 인한 이 시기의 정치적 공백기를 잘 이용해 그의 사상을 주장하는데 성공했고 많은 추종자를 가졌습니다. 하지만 끝내는 반대파를 키우는 역설을 낳았고 이단으로 몰려 가톨릭 교회로부터 파문과 처형을 당하였죠.


이 파문당한 사보나롤라의 추종자인 보티첼리는 이 그림의 맨 위쪽에 희랍어로 친절하게 관람자에게 이렇게 설명을 덧붙입니다.


‘이 그림은 1500년 말 이탈리아의 혼란기에 나, 알레산드로(산드로는 애칭)가 이 시기의 후반부에 그렸는데 이는, 요한 계시록 11장에 기록된 계시의 두번째 재난인 삼년 반동안 악마가 풀려났다 12장에선 다시 묶이는 것을 보여주며 그래서 이 그림에서도 악마가 다시 갇히고 묻히는 것을 볼수있다(This picture, at the end of the year 1500, in the troubles of Italy, I Alessandro, in the half-time after the time, painted, according to the eleventh [chapter] of Saint John, in the second woe of the Apocalypse, during the release of the devil for three-and-a-half years; then he shall be bound in the twelfth [chapter] and we shall see [him buried] as in this picture).’


보티첼리는 여러 정치적 상황으로 그 자신이 이 ‘시험기간’ 동안에 살고 있다고 믿었었고 이는 사보나롤라가 주장한 그대로이며 예수의 재림이 성서에 따라 곧 일어날 일이라고 믿었던 것같습니다(이로인해 그가 처음으로 그의 그림에 자신의 사인도 넣게 되었지요.). 이러한 세기말적이고 묵시록적인 사상이 담겨있기에 전체적으로 이 그림은 다른 예수탄생 성화와는 다르게 내용을 알고보면 희망과 따뜻함만이 아니라 어둡고 히스테리하며 약간은 공포와 신경증(neurotic)적인 느낌도 들수있습니다.


보티첼리는 사후 몇백년 동안 명성에 맞지 않게 잘못 이해되고 때로는 잊혀졌습니다. 이 신비의 예수탄생 그림도 영국인인 ‘윌리암 영 오틀리(William Young Ottley)에게 팔려 이탈리아에서 영국으로 시집을 오게 되었습니다. 그는 카리브해에서 노예 농장 주인이었는데(어떻게 노예 농장주인이 미술애호가?) 미술품에 관심이 많아 여러 이탈리아 작품을 구입했는데 이 그림도 아주 싸게 구입한 그림들 중 하나였습니다. 그의 사후에 다른이에게 다시 팔렸다가 런던 트라팔가 광장의 ‘내셔날 갤러리’에 내걸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보티첼리의 이 그림이 맨체스터에 전시되었을 땐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미술운동인 ‘프리 라파엘라이트(Pre-Raphaelites)의 화가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특히 이 운동의 중심화가들인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Dante Gabriel Rossetti)와 에드워드 번-존스(Edward Burne-Jones)는 보티첼리 미술기법을 상당히 차용하였다고 합니다. 사실 영국의 프리 라파엘라이트 그림들을 보면 화려한 색상, 구도, 내러티브 그리고 여성적인 ‘선’을 강조해 비슷한 점이 많이 보입니다.



하여튼 이 그림의 중심테마는 천상의 천사와 지상의 인간(또한 동물까지) 모두 메시아의 탄생을 축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첫번째 메시아의 오심을 정중앙에 보여주며(강조하며) 말하고자하는 것은 구세주의 두번째 오심(재림)을 상기시키는 목적입니다. 아기 예수의 배경인 어두운 동굴을 보십시요. 이 동굴은 메시아가 탄생한 구유가 있는 동굴이며 한편으론 메시아의 죽음(십자가 뒤에)이 있을 미래의 공간입니다. 또 당연히 ‘부활’이 있게 될 공간이죠. 한 공간에서 구원의 모든 진리가 펼쳐집니다. 다른 한편으로 그림의 맨 아래에 있는 악인들의 동굴을 보십시요. 부활의 미래가 없는 영원한 지옥의 문입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선택에 달려있습니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한폭에 전시하고 선과 악을 동시에 보여주는 예언자적 외침으로 구세주가 재림하실 때까지 그리스도교인으로서의 본분을 잊지 말고 더욱 정진하라는 윤리적 교훈도 이 그림에 숨어있지요.


자, 그러면 왜 세명의 동방박사가 선물을 들고 있지 않을까요?



정답은 ‘곧 사라질 물질(금은보화)로 아기 예수님께 선물하지 말고 ‘믿음, 사랑, 그리고 희망’의 그리스도교 덕목으로 사는 것이 최고의 선물이다’라고 보티첼리는 암시합니다. 지금 우리의 시대에 딱 들어맞는 이야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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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Sandro Botticelli

연도: c. 1500–1501

재료 타입: Oil on canvas

사이즈: 108.5 cm × 74.9 cm (42.7 in × 29.5 in)

소장: National Gallery, Lond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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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로운 성탄' 부분
보티첼리의 '프리마베라'

보티첼리(왼쪽)

'비너스의 탄생'(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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