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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으로 꾸는 꿈-시장 경선 출마

- 시장 경선 출마

by 강효진

"피아노를 치면 손이 예뻐진대."

마디가 굵고 크기만 한 내 손을 걱정하던 엄마는 기막힌 해결 방법을 찾은 것처럼 말했다. 진주처럼 고운 엄마 손에 이끌려 처음 피아노 학원에 갔던 게 일곱 살이었다. 외계인의 암호 같기만 했던 악보가 눈에 읽히고, 엄마가 자주 듣던 이용 아저씨의 '잊혀진 계절'을 듣고는 내 멋대로 더듬더듬 칠 수 있게 되면서부터 피아노 앞에 앉는 게 재미있어졌다. 나와 함께 피아노를 배우던 친구들이 하나 둘 그만둘 때에도, 나보다 2년 뒤에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던 동생이 3년만에 그만 둔 뒤에도, 나는 여전히 피아노를 배웠다.

몇 년 째 피아노를 치도록 넓적하고 두툼한 손바닥에 울퉁불퉁한 손가락은 예뻐질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지만 상관 없었다. 내 손은 '도'에서 다음 옥타브 '레'까지 무리없이, 조금 애쓰면 '미'까지 짚을 수 있을 만큼 큼직했고, 굵고 튼튼한 손가락은 타건 감각이 좋은 편이었다. 내 인생에서 가장 각별한 우정을 나누었던 피아노 선생님들의 무섭고도 다정한 가르침과 격려는, 투박한 내 손으로 하여금 건반 위에서 꿈꾸게 했다.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었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피아니스트의 모습이 어린 내 눈에는 마법사 같았다. 그는 긴 드레스 자락에 빛을 숨겨두었다가 피아노 건반을 눌러 만드는 멜로디로 여리거나 강한 빛을 리듬에 맞춰 무대 위로 비추고 있었다. 강인하고 아름다운 마법사가 되기 위해서 피아니스트가 무엇을 감당해야 했는지를 나는 알지 못했다. 그토록 크고 거창한 꿈이 나를 홀렸다. 나의 꿈은 오직 하나였다.


중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꿈 하나만을 꾸었던 게 문제였을까. 엄마보다 내가 먼저 좋은 선생님을 찾는 데에 적극적이었으면서, 입시 레슨을 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길을 잃었다. 피아노 치는 것을 좋아하는 것과 피아노를 치는 사람이 되는 것은 다른 문제라는 당연한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피아노는 내가 '이 정도면 됐다'고 생각하는 정도의 연습만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내가 감당하고 싶지 않을 만큼 많은 것을 요구했다. 그것이 내 부족한 재능의 증거라고 생각했다. 지치지 않는 노력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재능이라는 측면에서 이것은 꽤 정확한 판단이었다. 나는 습성대로 너무 쉽게 실패를 떠올렸다. 나의 재능은 실패를 구체적으로 상상하는 데 있어서만큼은 탁월했다.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는 나와 그런 내게 실망하고 절망하는 부모님... 우리집 형편으로 감당하기에는 비싼 레슨비를 들이고도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한 내 모습은, 무대 위의 피아니스트가 되어 품고 싶었던 빛을 단번에 꺼버릴 만큼 강렬했다. 나는 하나, 둘, 피아노에게서 도망칠 핑곗거리들을 수집했다.

그 즈음 우연히도 내가 쓴 글을 읽은 선생님들로부터 글을 더 써보면 좋겠다는 응원의 말들을 듣게 되었다. 제법 큰 대회에서 상을 타는 행운도 따랐다. 나는 하루에도 여러 번 틈만 나면 일기 쓰기에 몰입했다. 마치 일기를 쓰기 위해 사는 아이인 것처럼. 좋아하는 소설을 흉내낸 유치한 소설을 끄적거리고, 틈틈이 시를 써서 나만의 시집을 만들었다. 이것이야말로 정말 내가 하고 싶은 일이라고 여겨졌다. 무엇보다 글을 쓰는 일에는 피아노를 배우는 것처럼 돈이 들지 않아 안심이었다. 피아노를 그만 두면 엄마 아빠가 돈 때문에 싸우는 일이 조금은 줄어들지도 몰랐다.

점점 피아노 앞에 앉아서 책을 읽는 시간이 늘어났다. 당연히 일주일에 하루도 제대로 연습하지 않는 날들이 이어졌다. 억지로 레슨을 받으러 가서 선생님께 혼이 났고, 돌아와서는 엄마에게 피아노를 그만 두겠다고 고집부렸다. 전공을 하지 않아도 좋으니 취미로 계속 피아노를 치는 게 어떻겠느냐는 선생님과 엄마의 말이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엄마의 회유가 살가울수록 피아노를 그만두고 싶다는 나의 철없는 오기는 더욱 기세등등해졌다.

중학교 졸업을 앞둔 겨울, 2년에 가까운 투쟁을 견디다 못해 엄마는 마침내 항복하고 말았다. 엄마가 자포자기한 목소리로 레슨을 가지 않아도 좋다고 내뱉자마자, 나는 피아노 선생님 댁에 가는 대신 함께 영화를 보러 가자던 친구에게로 달려갔다. 그날은 앞뒤로 무거운 방음문이 꼭꼭 닫힌 깜깜한 영화관 안으로도 상쾌한 바람이 불어왔다. 해방감이 얼마나 시원한 것인지를 그때 알았다. 그것은 재능없음을 버젓이 보여주는 피아노로부터의 해방, 실패가 예정된 불운한 미래로부터의 해방이었다.

그 바람은 그리 오래 지속될 수 없었다. 피아노를 치는 것에서 글을 쓰는 일로, 단지 내 손과 부족한 재능의 쓰임새가 달라졌을 뿐이라는 것을 곧 깨닫게 될 터였다. 아니 실패를 피하려다가 불러온 더 큰 실패가 내 인생에서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


음식물 쓰레기 자원화 시설을 그만둔 아빠는 곧 사람이 조금이라도 모인 곳이라면 어디든 악수를 하러 다니기 시작했다. 길을 걸으며 지나치는 시민들과도, 전통시장에서 일하는 상인들과도, 관내 시민 축제에서 만난 사람들과도. 누구를 만나든 고개 숙여 인사를 하면서 동시에 두 손을 내밀어 상대의 오른손을 감싸 잡았다. 아빠를 알아보고 먼저 손을 내미는 사람이 고마워서 얼싸안듯 악수를 했고, 아빠에게 별 관심을 주지 않는 사람에게는 더 커다란 목소리로 인사하며 다가가 두 손으로 그의 손을 지긋이 잡았다. 잠깐이라도 그와 눈을 맞추고 체온을 나누려 했다.

예비 후보 등록을 마치고 시장 경선에 출마한 아빠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 뿐이었다. 악수를 얼마나 많이 했느냐고 물었을 때, 아빠는 심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얼마 못했어. 글쎄, 하루에 100번, 많아야 200번."

그저 큼직하고 두툼한 손을 내미는 일일 뿐이었지만, 손을 맞잡는 순간 상대의 마음이 읽혔다. 끝까지 아빠와 눈을 마주치지 않는 사람, 맞잡은 두 손이 무색하게 닿자마자 얼른 빼버리는 사람과는 악수를 하고 나서도 어쩐지 개운치 않았다. 그런가 하면 아빠가 손을 내밈과 동시에 두 손을 힘껏 내미는 사람, 아빠의 손등과 손바닥, 손가락까지 두 손으로 감싸 오래도록 잡고 있는 사람, 손에 조심스럽게 힘을 모아 아빠의 손으로 굳센 기운을 전하는 사람과 악수를 하고 나면 없던 힘도 차올랐다. 제대로 꾸어본 적 없었던 아빠의 꿈이 이루어질 것만 같았다.


어린 시절, 아빠는 꿈이 없었다. 친구들이 대통령이니 과학자니 거창한 대답을 할 때, 아빠는 가난에서 벗어나 그저 남들처럼 잘 살아보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 뿐이었다. 온몸이 부서지도록 고생스럽게 일해 봤자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부모님을 보면서, 농사꾼이 되어서는 절대 안된다는 걸 어린 나이에 자연스럽게 터득했다. 부모님은 학교에서 돌아온 어린 아들에게 심부름을 시키기 바빴다. 논에 나가 새를 쫓는 일에서부터 마당을 쓸고, 산에서 나무를 해 오고, 수도가 없어 물이 귀했던 그 시절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했던 우물물을 길어오는 일까지. 먹고 사느라 하루하루 쫓기던 부모님은 어린 몸에 벅차도록 집안일을 도와도 칭찬은커녕 관심조차 가져주지 않았다. 그럴 겨를이 없었다.

학교에서는 달랐다. 힘들게 몸을 쓰지 않아도, 그저 책상에 앉아 선생님 말씀만 잘 들어도 학교 생활은 즐거웠다. 숙제를 열심히 하고, 배운 대로 공부를 해서 시험을 잘 치면 선생님의 칭찬을 듬뿍 받을 수 있었다. 어렸던 아빠에게는 차라리 학교가 집이었다. 어린 아이가 꿈꿀 수 있는 가장 아늑한 집. 선생님을 도와 환경미화 작업을 하거나, 시험이 끝나고 친구들의 시험지를 채점하는 일 등을 자주 해야했던 것도 아빠에게는 선생님의 인정을 받아 뿌듯한 일, 그래서 얼마든지 하고 싶은 일이었다.

그렇게 늦도록 학교에 남았던 날이면 귀가길이 문제였다. 집과 학교 사이에는 긴 산길과 언덕배기 두 개가 있었는데, 늦은 하교길의 산속은 일찍 해가 져서 어두침침했기 때문이었다. 평소 푸릇푸릇하기만 했던 수풀은 잔뜩 풀어헤친 귀신 머리카락처럼 보였고, 발밑의 희미한 그림자는 무시무시한 도깨비 형상을 하고 있었다. 홀로 걷는 발소리만 으스스하게 울리는 교교한 숲속을 걸어 무사히 집에 도착하고 나면 조금 전까지 무섬증에 떨게 했던 산길에서의 풍경들은 가뿐히 사라졌다. 학교가 제일 좋았던 아이는 내일 다시 학교에 갈 수 있다는 것만이 기쁠 뿐이었다.

장학금을 받으며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니며 꾸어본 교사의 꿈은, 그러나 현실적인 이유로 이루지 못했다. 공무원으로 인생의 대부분을 살면서 언젠가 시장이 되어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꿈 역시 지방자치단체장을 시민들이 직접 뽑는 민선제가 도입되면서 접어야 했다. 시장 선거에 출마한다는 것은 언감생심, 아빠가 꿀 수 있는 꿈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시청에서 오랜 시간 함께 일했던 공무원 후배가 시의원 출마를 염두에 두고 있다며 아빠에게 조언을 구했을 때, 아빠는 진심으로 그를 만류했다. 아무리 이 도시에서 오랫동안 일을 했다해도 이 지역 출신도 아닌 사람이 선출직에 나선다는 건 어려운 일이라는 점, 무엇보다 박봉 생활을 하느라 모아둔 큰 돈도 없이 연금으로 그럭저럭 살아가는 퇴직 공무원이 선거에 나선다는 건 너무 힘든 일임을 조목조목 말해 주었다. 이 모든 말들은 그대로 아빠 스스로에게 해 주는 것이기도 했다. 선거 출마를 잠시라도 품어본다는 건 말 그대로 욕심이었다. 아빠는 욕심의 싹을 잘라냈다. 아빠의 손은 스스로 필요 없다고 판단한 것들을 잘라내는 데에 주저함이 없었다.

다 잘라낸 것 같아도 토양과 햇빛, 물이 어느 정도 마련되면 한순간 불쑥 자라나고 마는 것 또한 욕심인지도 몰랐다. 지인을 통해 한 정당의 지구당 위원장으로부터 시장 선거에 참여해 달라는 제안을 받았을 때, 단칼에 거절하긴 했지만 갓난 아기의 손처럼 작고 여린 싹이 슬몃 돋아났다. 몇 달 후 연락이 닿은 경쟁 정당의 지구당 책임자를 만나고 났을 땐 아빠 마음 속 식물도 걷잡을 수 없이 자라있었다.

행정에 대해 잘 모르는 인사가 시장이 되었다가 논란을 일으키거나 직위해제에 이르는 등의 일들이 그 도시는 물론 주변 지자체에 생기면서, 행정 경험이 많은 사람이 시장이 되는 것이 좋다는 말들이 선거를 앞두고 퍼져나가고 있었다. 재산에 욕심내지 않고 오직 시를 위해 성실히 일한 아빠는 당시 선거판에 꼭 들어맞아 보였다.

이미 여섯 명의 예비 후보가 있는 상황에서도 공천을 책임지고 있는 이가 아빠를 적극적으로 설득했을 때, 아빠는 마음을 굳혔다. 엄마의 반대도 아빠를 막을 수 없었다. 남들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사야 하는 확실한 땅이라고 알려주어도 분수에 맞지 않게 대출 받는 게 부담스러워 좋은 기회를 번번이 날리곤 했던 아빠는, 인생에서 거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가장 큰 결단을 내린 것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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