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두지 May 05. 2022

할아버지는 계속 고맙다고 하셨다.

인생의 장면들 (5) 

인생의 장면들

할아버지 한 분이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다. 나는 아이스크림을 다 먹고 남은 막대기를 앞니로 잘근잘근 씹으며 할아버지의 시선을 외면한다. 이따금 나도 할아버지를 힐끔힐끔 엿본다. 긴 얼굴. 왼쪽 볼 중간부터 턱까지 난 거뭇한 검버섯. 시간을 들여 정리한 듯한, 한쪽으로 넘겨 빗은 은색 머리카락.      


“안녕하세요?”      


나무 맛이 나는 젖은 아이스크림 막대기에 집중하는 척하며 시선을 피하는 건 1분 정도가 한계인 것 같다. 늦가을이었다. 나무에 매달려 있다 끝내 떨어져 버린 죽은 잎사귀, 알맹이만 빼앗기고 버려진 밤송이 껍데기가 길바닥에 가득하다. 할아버지와 내가 앉아있는 곳은 경상북도 상주시 외각에 있는 한 작은 구멍가게 앞 평상이다. 평상 옆으로 노란 잎사귀를 가득 단 은행나무가 멀뚱하게 서 있다. 할아버지는 시들어버린 꽃 한 송이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앉아있다.      


“여.....”     


할아버지의 입 주위에 주름들이 한껏 모이더니, 고작 한 음절이 내뱉어졌다. 나는 들고 있던 나무 막대기를 평상 한쪽에 내려놓고 할아버지 쪽으로 바짝 다가갔다. 할아버지를 올려다보며 할아버지의 입 모양을 살폈다. 수그러진 할아버지의 고개 아래로 작은 입술이 결심한 듯 잔뜩 오므려졌다가 조금 커지더니, 다시 가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 여행.”

 “네.”

 “여행. 해요?”

 “네 맞아요.” 

 “걸어서 해요?” 

 “네 맞아요. 안동으로 걸어가려고요.”      


할아버지와 나의 눈이 마주쳤다. 작은 관심의 표현이 나와 할아버지의 눈 사이로 오갔다.      


   “나도. 그. 고등학교. 2학년.... 고등학교 때... 영주에서 서울까지 걸어갔어요. 치, 친구들이랑.”

   “그래요?”

   “으응. 우리는 나흘. 나흘 만에. 걸었어요.”

   “나흘이요? 말도 안 돼. 경상도 영주에서 서울까지 어떻게 나흘 만에 걸어요. 거리가 얼만데.” 

   “진짜. 진짜요. 우린. 고등학생 남자들이었으니까. 흐흐...”      


뭐가 재밌으신지 할아버지가 웃으신다. 할아버지에게도 십 대 시절이 있었구나. 그럼, 당연하지. 궁금해진다. 할아버지는 고등학교 때 어떤 사람이었을지. 그 어렸던 시절과 지금 이 평상에 앉아있는 시간 사이에는 어떤 장면들이 있었을지. 나는 두 팔을 뒤로 뻗어 평상에 누운 듯 앉았다. 아직 많이 차지 않은 늦가을의 바람이 우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할아버지는 고향이 영주예요?” 

“네... 여기가 내 고향. 고향이요. 영주서 고등학교까지 나오고... 서울로 대학을 갔어요. 근데... 대학 다닐 때 집이 망했어. 휴학하고 국비 지원. 그게 되는 전문대 가서. 경찰이 됐어. 35년 동안 경찰 일을 했어. 서울에서. 근데 지금은 몰라도. 당시에 공무원 월급은. 말도 안 됐지. 너무 적었지. 그 돈으로. 부모님, 동생 둘, 아내, 자식. 다 부양해야 하는데. 힘들더라고. 안 되겠더라고. 생활고. 때문에. 정년퇴직 못했어. 그만뒀어.” 

“아.... 그럼 그다음에는 뭐 하셨어요?” 

“에이. 몰라. 그것도 다. 옛날. 옛날 일이야. 뇌경색이 있어서. 언어장애가 생겼어. 지금은 여기 뒤에. 요양병원서 지내요.”     


할아버지가 오른팔을 들어 구멍가게 뒤쪽을 슬쩍 가리킨다. 하얀 건물 하나가 구멍가게 길 건너에 육중하게 서 있다.       


“그렇구나. 그래도 말씀 잘하시는데.”

 “오늘은 잘 되네... 근데. 이렇게. 잘하다가도. 가끔. 안 돼. 나가서 친구. 그…. 친구들도 만나고. 그래야 하는데. 말 이상하게 한다고…. 손가락질받을까 봐 안 만나.”     


   할아버지의 고개가 다시 수그러들었다. 엄마 생각이 난다. 몇 년 전, 엄마는 수영장 가서 아줌마들이랑 노는 게 너무 재밌고 좋은데, 점점 옷 갈아입기가 힘들어져서 이제 못 다니겠다고 했다. 사람들이 수군댈까 봐 무서워서 그만둬야겠다고. 그 말을 하고는 애처럼 울던 엄마. 할아버지도 가끔 울까. 우리 엄마처럼. 할아버지가 손에 들고 있던 물통을 만지작거렸다. 뭐라고 말해야 할까. 뭐라도 말해드리고 싶은데.      


“산책하러 나오신 거면 저랑 조금 걸으실래요?” 

“그래요. 좋아요.”      


할아버지가 평상에서 일어섰다. 일어서니 키가 정말 크시다. 이 방향으로 가면 안동 맞지요? 키가 190cm는 되는 것 같은 할아버지가,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위해 내 쪽으로 몸을 기울인다. 내가 할아버지의 말을 잘 듣기 위해 다가갔던 것처럼. 고등학교 시절 영주에서 서울까지 나흘 만에 걸어갔다던 할아버지의 걸음은 느리기로 유명한 나의 걸음보다 느리다. 할아버지와 나는 누가 더 느리게 걷나 내기라도 하듯 느리게 걸었다. 보도블록 옆으로 차들이 쌩하니 달려 나간다. 차들이 아무리 빨라도, 세상이 아무리 빨리 돌아가도,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기분이 든다.           


   “건강하세요, 할아버지.”

   “고마워요."     


영주 시내로 이어지는 큰 건널목 앞에서 발을 멈췄다. 고마워요, 정말. 할아버지는 계속 고맙다고 했다. 뭐가 고맙다고 하시는 거지.     


신호등에 녹색 불이 들어왔다. 횡단보도를 반쯤 건너고 뒤를 돌아봤다. 할아버지가 뒷짐을 지고 나를 지켜보고 있다. 횡단보도를 다 건너고 다시 뒤를 돌아봤다. 할아버지가 천천히, 병원 건물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언제 또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실 수 있을까. 그의 느리고 매끄럽지 않은 걸음걸이를 보고 있자니 조금은 알 것 같다. 왜 고맙다고 하신 건지.           





인생의 장면들(Scenes from Life)은 사람들의 실제 삶의 장면들을 담은 영상•글 시리즈입니다.



이전 04화 할아버지는 매일 밤 아내에게 말을 건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