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식 간장 비빔국수, 고기는 필수지 옵션이 아냐
한참 파스타에 빠져있을 때 하루 세끼 국수만 먹는 것을 꿈꿨다. 파스타, 우동, 칼국수, 메밀국수, 자장면, 잔치국수 등 온갖 국수를 돌려가면서 아침 점심 저녁을 먹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행복할 것 같았다. 그런데 어느 날부턴가 파스타를 먹으면 소화가 잘 안 되기 시작하였고, 그렇게 '삼시 세끼 국수 먹기'의 꿈은 잊혀갔다.
베트남에는 온갖 종류의 다양한 국수가 있다. 가지 수로만 따지면 아침 점심 저녁 다양한 조합으로 돌려먹을 수 있는 건 문제도 아닐 듯싶다. 게다가 밀이 아닌 쌀로 된 국수가 많아 소화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오히려 소화가 너무 잘 되어서, 다음 끼니가 되기 전에 배고파지는 것을 걱정해야 할 것이다. 이쯤 되면 하루 세끼 국수 먹기의 꿈을 이 곳에서 이룰 수도 있을 듯싶다.
저번 글에서 다룬 분보남보는 베트남에 온 지 얼마 안 되어서 알게 되었지만, 둥근 면 bun이 아닌 납작한 면 pho도 비빔면 버전으로 먹을 수 있다는 건 베트남에 온 뒤 한참 뒤에야 베트남 친구를 통해 알게 되었다. 흔히 우리가 '베트남 쌀국수'라고 알고 있는 것은 포느억(Phở nước)인데, 느억(nước)은 물을 뜻하는 베트남어이다. 보통 음식점에서는 굳이 포느억(Phở nước)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아도, 국물이 있는 쌀국수를 준다. 그리고 오늘 이야기할 비빔 쌀국수는 포촌(Phở Trộn)으로 Trộn은 비빔을 의미한다. 포느억(Phở nước)과 포촌(Phở Trộn)은 우리나라 물냉면/비빔냉면처럼, 사용되는 국수만 같지 맛은 완전히 다른 음식이다.
(왼) 분보남보 (오) 닭고기 포촌 출처: 구글 이미지
분보남보가 남부 음식인 것과는 달리, 포촌은 북부 음식이다. 단골 분보남보 집과 포촌 집이 걸어서 5분 정도 거리라 항상 근처에서 남부식 비빔국수를 먹을지 북부식 비빔국수를 먹을지 고민하곤 한다. 소고기와 닭고기 사이에서의 고민이기도 하다. 많은 곳을 가본 것은 아니라 섣부른 일반화일 수 있으나 남부 비빔국수인 분보남보가 북부 포촌에 비해 야채며 향신료가 더 다양하고, 들어가는 소스도 더 달콤하다.
분보남보의 소스에 비해 포촌 소스는 짭조름 한 맛이 더 강하다. 그렇다고 강렬하게 짠 건 아니다. 포촌에는 기본적으로 소금, 피시소스, 설탕, 마늘, 간장, 식초가 들어간다. 우리 음식 중에 굳이 비슷한 맛을 찾자면 간장 비빔국수 정도가 있겠지만, 피시소스가 들어가서인지 참기름이 안 들어가서인지 간장 비빔국수와는 확실히 다르다.
우리나라 간장 비빔국수와의 가장 중요한 차이 중 하나는 고기의 역할이다. 우리나라 간장 비빔국수에는 고기가 보통 안 들어가고, 넣더라도 고기는 옵션 같은 것이다. 그러나 포촌의 고기는 옵션 아닌 필수다. '넣거나 안 넣거나'가 아닌 다진 돼지고기, 닭고기, 소고기 중 어떤 것을 선택할 것인가의 옵션이 있을 뿐이다.
포홍항홈 Phở Hồng Hàng Hòm
주소 : 11 Hàng Hòm, Hàng Gai, Hoàn Kiếm, Hà Nội
이 곳이 최고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 나는 이 곳 포촌밖에 먹어보지 못했다. 그러나 맛에 예민한 베트남 친구가 추천해 준 곳이라 최소한 정말 맛있는 곳 중 하나일 것이라는 믿음은 있다. 맛있는 음식에는 굳이 대조군이 필요 없는 것 같긴 하다.
아무튼. Hang Hom 거리에 위치해 있는 포홍항홈(ㅋㅋㅋ) Phở Hồng Hàng Hòm은 분보남보와도 상당히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다. 간판에 Pho Hong이라고 쓰여있으니 간판을 찾아 들어가면 될 것이다. 참고로 구글 맵에는 옆집 (15 hang hom, hang gai, hoan kiem, hanoi)만이 등록되어 있고, 이 곳은 등록되어 있지 않다.
나는 닭고기 포촌(phở trộn gà)만 먹어봐서 다른 메뉴의 맛은 어떨지 잘 모르겠다.
영업시간을 모르고 점심에 가서 허탕치고 근처 분짜 항마잉에 갔는데 매우 실망한 적 있다는 건 안 비밀
나는 고기 냄새에 비교적 관대한 편이라 크게 신경 쓰일 정도는 아니었는데, 예민한 사람은 다소 거슬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주의사항이라고 하기도 우습지만, 까먹고 치마를 입고 갔을 경우 꽤나 신경 쓰이니 바지를 입도록 하자. 혹은 치마를 덮을 외투를 준비하던가. 내가 자주 잊어버려서 덧붙인 주의사항이다.
눈이 번쩍 뜨일 만큼 맛있는 맛일지는 모르겠지만, 만족스러운 한 끼를 할 수 있을만한 곳이다. 분보남보에 밀려 조금 덜 가긴 했지만, 이 곳도 꽤 훌륭하다. 두 곳 모두 음식이 꽤 가벼워서, 양이 많은 사람이라면 분보남보 한 그릇, 여기서 포촌 한 그릇 먹어도 될 것 같다. 그런 충동이 들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나 나는 아직까지 시도해본 적은 없다.
며칠 전 스리랑카를 2주 여행하고 베트남으로 넘어왔다는 호주 배낭여행객을 만났다. 스리랑카에서 2주간 커리와 밥만 먹다가 하노이로 와서 각종 베트남 음식을 먹느라 예정보다 너무 오래 하노이에 머물게 되었단다. 그들은 하노이의 트랩에 빠져 떠나지 못함을 주의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얘들아 먼저가 난 이미 틀렸어
부디 내가 한국에 돌아갔을 때에는 싸고 맛있는 베트남 음식점이 한국에 많이 생겨 있길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