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십 년도 더 된 사이. 다영과 은수는 PC통신이 한창 유행하던 1990년대 후반에 알게 됐다. 둘은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한창 PC통신이 유행이던 시절, 하이텔과 천리안을 동시에 가입해 달라며 며칠 동안 엄마를 졸졸 쫓아다녔던, 가족 중 누가 전화기를 들면 통신이 끊겼던 그때.
파란 바탕에 하얀 글씨, 조금이라도 눈에 띄고 진심을 잘 전달하기 위해 특수기호를 활용해 이모티콘을 애써 만들기 시작할 무렵 둘은 하이텔 친구 찾기 메뉴를 통해 만났다. '부산, 경상도, 고등학생'이라는 키워드로 서로를 검색했고 메일을 주고받았다. 한석규와 전도연이 주연이었던 영화 '접속'은 설렘 가득한 여고생 다영에게 PC통신 친구에 대한 낭만을 가득 품게 했다. 다영은 나조차 모르는 내 안의 나를 찾아줄 것 같은 영혼의 단짝이 파란 모니터 화면 속에 있다고 믿었다.
전혀 자율적이지 않았던 야간자율학습을 마치고 집에 오면 저녁 10시. 샤워 후 엄마가 차려놓은 간식을 들고 방문을 닫으면 10시 30분. 그때부터는 혼자만의 시간이다. 저녁 11시가 넘으면 거실에서 드라마를 보던 엄마가 TV를 끄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간식 접시를 싱크대에 넣어둔다는 핑계로 가족들이 모두 잠들었다는 것을 확인한 다영은 조용히 컴퓨터를 켰다. 담요로 컴퓨터를 덮어 PC통신에 접속되는 모뎀 소리가 최대한 방 밖을 빠져나가지 않게 해도 날카롭고 뾰족한 소리에 항상 마음 졸였다. 메일함 옆에 있는 괄호 안에 숫자 '1'이 적힌 것을 보며 다영은 담요를 걷어내고 컴퓨터 앞에 자세를 고쳐 앉았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지만 다영과 은수는 이미 베스트프렌드였다. 날씨가 화창한 날에도 독서실에 틀여 박혀 있어서 답답했다, 수험생활이 과연 끝나긴 할까, 사이코패스 같은 담임 선생님이 야자를 튀다 걸린 애들을 발로 찼다는 얘기 등 메일에 적을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다. 은수의 답장은 다영에게 충분히 위로가 됐다. 다영은 은수에게, 은수는 다영에게, 마치 자신에게 쓰는 일기처럼 정성스럽게 메일을 적었다. 얼굴을 보고 생활을 함께 하는 학교 친구보다 다영과 은수는 더 가까웠다. 모두가 잠에 든, 저녁에서 새벽으로 넘어가는 시간은 사람을 솔직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얼굴 보고 말하기엔 부끄럽거나 부모님 귀에 들어갈까 겁이 나 친구에게 하지 못한 말도 메일로는 솔직하게 적을 수 있었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면서는 메일이 뜸해졌지만 둘은 더 가까워졌다. 휴대폰이 생겼기 때문이다. 통화는 하지 않았다. '문자'로만 소통한다는 둘만의 원칙을 깨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신 하루에 열 번도 넘게 문자메시지 진동이 울렸다. 심지어 시험 치기 바로 전 긴장하는 마음을 문자로 적기도 했다. 은수와 다영은 수험생 생활이 힘들지만은 않았다. '대학진학'이란 목표가 있고 그 꿈을 함께 나눌 친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진짜 만날까?"
먼저 보자고 제안한 건 은수였다. 내성적이고 집순이였던 다영은 며칠을 고민하다가 "만나자."란 문자를 보냈다. PC통신으로 만난 사람을 직접 본다는 게 살짝 두려웠지만 동성(同姓)이고 그동안 마음을 주고받았기에 아무런 거리낌 없었다.
"네가 진짜 은수......?"
다영은 눈앞에 선 은수를 보고 깜짝 놀랐다. 은수가 여자가 아닌 남자였기 때문이다. 당황하는 다영과 미안한 은수. 당연히 은수를 여자친구라고 생각했던 다영은 자신이 썼던 수많은 메일 내용을 머릿속으로 스캐닝했다. 정확하게 기억나진 않지만 여자들만 아는 비밀스러운 얘기를 분명 많이 했던 것 같아 부끄러웠다.
"많이 놀랬지? 미안해. 진작 말하려고 했는데 타이밍을 놓쳤어."
그 후, 다영은 가장 소중한 여자친구 은수를 잃고 말하지 않아도 자신의 마음을 헤아려주는 남자친구 은수를 얻었다.
그렇게 둘은 어색함과 미안함, 편안함을 안고 사귀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