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하차역은 '거제 소방서'입니다."
다영은 펼쳐놓은 가방을 정리했다. 최종 목적지로 가려면 버스를 한번 더 갈아타야 되므로 에어팟은 귀에 꽂은 채 생수병만 가방에 넣고 버스에서 내렸다. 오늘 안에 그곳에 도착할 수는 있을까? 11번 버스를 타고 25분 정도를 더 가야 된다는데. 11번 버스는 또 어디서 타야 되는지. 진하고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생각을 정리하고 싶었지만 커피숍이 눈에 띄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다영은 다시 지도 앱을 켰다. 피곤함이 묵직하게 몰려왔다. 역시 중앙동 여객터미널에서 고현까지 한 번에 배로 오는 게 편했다.
다영은 배를 타고 거제도로 오는 게 좋았다. 줄곧 집과 학교만 다녔던 다영에게 바다 건너 다른 육지로 간다는 것은 일상을 탈출하는 것과 같았다. 은수와 헤어진 후에도 일상이 지겹고 힘들 때마다 배를 타고 옥포나 장승포로 홀가분하게 떠나는 생각을 자주 하곤 했다.
"다영아, 부산과 거제도를 연결하는 '거가대교'가 생긴데. 우리 그럼 더 자주 볼 수 있을 거야. 몇 년만 더 기다려줘."
뜬금없이 은수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하지만 자주 볼 수 있을 거라는 다영의 말과 반대로 거가대교 개통을 몇 달 앞둔 채 둘은 헤어졌다. 이젠 배편까지 끊겼으니 어차피 우리는 헤어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겠구나,라고 다영은 생각했다. 은수는 자주 허둥댔다. 다영이 탄 배가 도착하는 시간을 알고 있었음에도 매번 늦게 다영을 마중 나오곤 했다. 옥포항이 집에서 멀어서 늦었겠거니 싶어서 은수의 집과 가까운 고현항으로 갔는데도 늦었다. 거리가 문제가 아니었다. 전날 마신 술이 문제였다. 그때마다 은수는 세상에서 가장 나쁜 죄를 지은 죄인처럼 미안한 얼굴을 하며 다영을 데리러 왔다. 하지만 은수가 늦는 건 다현에게 별로 문제가 아니었다. 사랑하는 은수를 만나는 것도 좋았지만 잠시라도 낯선 곳에 혼자 있는 느낌도 좋았기 때문이다. 부산에서 부모님과 함께 사는 다영에게 배를 타고 와야 하는 거제도는 설레는 여행지로써 충분했다. 다영은 은수가 사는 거제도가 좋았다.
부산에 비해 소도시인 거제도였지만 11번 버스는 만원이었다. 노인이 많던 버스는 두세 정거장만에 교복을 입은 학생들로 붐볐다. 대부분 같은 성별끼리 모여 있었기 때문에 교복을 입은 커플이 눈에 쉽게 띄었다. 여학생 치마의 체크무늬 패턴이 남학생 조끼의 패턴과 비슷한 걸 보니 남녀공학인 것 같았다. 남학생은 자신이 잡은 자리를 여학생에게 양보하고 다시 섰다. 버스 손잡이 높이만큼 키가 큰 남학생이 연신 허리를 굽히며 여학생과 대화를 하려고 애쓰는 모습이 보였다. 다영은 보호를 받고 있는 여학생이 부러워졌다. 저렇게 누군가에게 보호받던 때가 자신에게도 있었던가.
"빗물이 많아. 내 어깨 잡아봐."
공중전화 부스 앞에 고인 빗물에 다현의 발이 젖을까 걱정하던 은수는 다영이의 허리를 한 손으로 감싸 안더니 마른땅에 조심히 내려놓았다. 은수는 다영을 늘 걱정했고, 다영은 자신을 걱정하는 은수가 더없이 든든했다. 이십 년이 지난 후, 버스 안에서 뜬금없이 은수의 따뜻한 보호가 그리울 거라고 다영은 생각조차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