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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마 Nov 15. 2017

은행밥

 어릴 적에는 뭔가를 주워 모으는 것을 좋아했다. 하나하나를 찾아낼 때의 쾌감과 그것들이 쌓여 있는 것을 볼 때의 뿌듯함 때문에 장난감 총알이며 색깔이 이상한 돌 따위를 온종일 주웠다. 그렇게 찾은 보물들을 한 보따리 그득이 집에 들고 가면 부모님은 질색했다. 그런 쓸데 없는 것들을 들여놓기에는 집이 좁았다. 부모님은 집의 비좁음과 통장의 비좁음, 직장의 비좁음을 어깨에 이고 살았다. 덕분에 그 비좁음이 내 어깨에 떨어지지는 않았지만, 나는 가끔 일고여덟 시간을 주워 모은 것들을 깨끗이 버리고 와야 하는 열 평짜리 원룸이 미웠다.


 그러나 내 괴벽이 칭찬받는 시기가 딱 한 번 있었으니, 그건 바로 가을이었다. 가을이면 은행이 사방천지에서 꼬릿한 냄새를 풍기며 후두두 떨어졌다. 또래들은 은행 없는 놀이터를 찾아 동네를 헤맸지만, 나는 은행 ‘노다지’를 찾아다녔다. 그렇게 몇 시간이고 은행을 주워 모아 제 머리통만한 비닐봉지를 끌다시피 집에 돌아가면 엄마는 만면에 미소를 지었다. 그 많은 은행의 껍질을 벗겨야 하는 아빠는 귀찮은 표정을 지었지만, 보따리를 밖에 두고 오라고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며칠 후에는 노란 은행이 송송 박혀 있는 은행밥이 상에 올랐다. 입이 짧던 나도 은행밥이 올라오면 참 맛있게 잘 먹었다. 그 시절 은행줍기는 최고로 재미있는 게임이었고, 은행밥은 고급 게임 아이템이었다. 한 스테이지를 깨면 나오는 보상 같은 거.


 내가 학업에 집중해야 하는 나이가 되기까지 게임은 계속됐다. 은행이 나름 고급음식이었던 탓에 다른 계절에는 맛보기 어려웠지만, 가을이면 팝콘 대신 구운 은행을 먹을 정도로 심심찮게 먹을 수 있었다. 은행은 여러 비좁음들 사이에서 툭하고 튀어나온 작은 사치였다. 그 사치를 내 게임이 가능케 한다는 게 좋고 또 좋았다.


그래서 나는 비좁음이 버거워질 때면, 가을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유일하게 다니던 영어 학원을 끊어야 했을 때도, 난생 처음 본 초콜릿을 까먹던 친구 집에 놀러갔을 때도. 수학여행을 못 간다고 담임선생님께 말씀드리던 날도, 비싼 사발면과 싼 사발면 앞에서 오래도록 서성이던 날도. 학업이 바빠져서 은행을 주우러 나가지 못했을 때도 나는 가을을 기다렸다. 가을이 되어봤자 달라지는 건 없었지만, 무언가를 기다리지 않으면 견디기 어려운 순간들이 있다. 그 시간이 오래되면서 나는 은행이 아니라 가을을 좋아하는 사람이 되어갔다.


 그렇게 나는 어른이 됐다. 그것도 은행을 마트에서 사먹을 수 있는 어른이 됐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은행을 먹지 않는다. 그 시절이 너무 물리고 지쳐 은행은 쳐다보기도 싫다. 대신 다른 종목의 게임을 시작했다. 책 모으기, 피규어 모으기, 음반 모으기 같은 게임들이다. 그 때 쓰던 검은색 비닐봉지 대신 예쁜 장식장과 책장에다가 예쁘게 정리해둔다. 어릴 적 집 밖에 놓고 와야 했던 그 쓸데없는 보물들을 대신하듯 열심히 모으고 또 열심히 쌓아놓는다.


 쌓다 보면 아직까지 드리워진 어린 시절의 비좁음이 조금쯤 옅어지는 느낌이 든다. 내 게임들 중에서 ‘은행’만이 승인되던 시절을, 그리하여 은행을 모을 수 있는 가을을 기다려야만 하는 시절을 나는 끝내 지나쳐온 것이다. 장식장을 보면서 나는 가끔 그러한 승리감에 도취되고는 했다. 그런 날이면 자랑을 하듯 부모님께 전화를 걸어 필요한 것 없냐며 용돈을 부쳐드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부모님은 아직도 가을이면 은행밥을 지으신다. 그리하여 매 추석이면 나는 상 앞에서 노란 은행이 콕콕 박힌 밥과 눈싸움을 한다. 그러다 어머니가 “밥 식겠다,” 하시면 나는 결국 “네,” 하고 숟가락을 들고 만다.


 사실 내가 주워 온 그 은행이 밥상에 오르기 위해서는 그 냄새나는 껍질을 벗기고 또 딱딱한 껍데기를 깨야 하는 지난한 노동이 필요했음을 이제는 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은행을 그리 좋아하지 않으셨다는 것도.


 희망조차 요원해서 기다림에 매달려야 했던 그 시절이 나에게 소중해질 수는 없을테다. 견디어냈다기보다는 견딜 수밖에 없던 시절이었다. 그래도 나는 부모님 앞에서 은행밥을 먹는다. 당신들이 내 게임을 지켜주고 싶어 했던 그 마음을 먹는다. 그리고 이렇게 세월이 지나 잔영처럼 남은 얼마만큼의 미안함과 고마움을 먹는다. 밥이 식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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