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나는 계란을 기준으로 사람을 구분했다. 노른자를 좋아하는 사람, 그리고 흰자를 좋아하는 사람. 나는 흰자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노른자를 좋아하는 사람과 같이 계란을 먹고 싶었다. 흰자를 좋아하는 사람과 계란을 먹으면 싸울 거라 생각했고, 싸우니까 그들과 계란을 같이 먹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나이를 먹으면서 기준은 조금 더 다양해졌다. 내가 좋아하는 김광석을 좋아하는 사람, 좋아하지 않는 사람. 나와 정치 성향이 같은 사람, 정치 성향이 다른 사람. 어쨌거나 그들은 같이 계란을 먹기 위해 싸워야 하는 사람들, 또는 싸우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평화롭게 계란을 먹을 수 있는 사람들이 좋았다. 그래서 내 주변을 노른자를 먹는 사람들로 채웠다. 아이러니하게도 나이가 먹어갈수록 그들은 나와 비슷한 선택을 하는 이들이었다. 내 주변에는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남았고 나는 싸울 것이 없는 관계에 익숙해졌다. 계란은 폭신폭신했고, 맛있었다.
그러다가 흰자를 좋아하는 네가 내 세계로 들어왔다. 넌 현상을 중요시했고 난 관념을 중요시했다. 난 옳음이 중요했고 넌 좋음이 중요했다. 걸리적거리는 것 없이 자유로웠던 숟가락이 자꾸만 부딪히기 시작했다. 네 숟가락과 내 숟가락은 곧잘 마주쳐 쨍그랑 쨍그랑 깨지는 소리를 냈다. 항상 폭신폭신하고 맛있는 계란도 아니었다. 우리는 어떤 날은 하나도 익지 않은 날계란을, 어떤 날은 하도 삶아서 뻑뻑해진 계란을 같이 나눠먹어야 했다.
그런데도 난 그 계란을 먹으려고 악착같이 달려들었다. 세상에 있는 계란이 그것 하나뿐인 것처럼 숟가락을 놓을 수가 없었다. 놓으면 굶어 죽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자꾸만 빠져나가는 숟가락을 움키고 계란에 매달렸다.
그런데 자꾸 먹으니, 어느 순간 노른자가 먹을 만 했다. 떡볶이 국물에 넣어 부숴 먹어도 맛있었고, 우유를 홀짝이면서 먹어도 맛있었다. 그리고 네가 흰자를 먹는 모습이 좋았다. 네가 노른자를 좋아하기 시작하는 모습도 좋았다. 너와 계란을 먹는 것도, 네가 계란을 먹는 것을 보는 것도, 맛있어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