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류 수염용 과 푸른갈기종 카마라쿠
카마라쿠가 죽었다. 허옇게 배를 드러내고, 한강철교에서.
카마라쿠는 출생부터 죽음까지 세간의 화제였다. 그는 용류 수염용 과 푸른갈기 종이었는데, 그 종이 대체로 태평양에서 부화하는 것에 반해 그는 서울 청계천이라는 작은 개천에서 출생했다. 수려한 외양으로 유명한 푸른갈기 종답게 뚜렷한 눈매와 은색으로 빛나는 비늘로 인기가 많았다. 신문은 연일 카마라쿠의 소식을 담았다. 사람들은 그의 이야기를 듣기를 좋아했다. “카마라쿠 비늘을 보면, 왠지 세상이 반짝이는 것 같지 않아요? 뭔가 넥타이 매는 것도 즐거워지고, 적금통장 열어보는 것도 좋아지고.” 한 30대 직장인은 부동산 전단지를 뒤적이며 말했다. 전세에서 자가로 옮겨갈 준비 중이라 했다.
1960년, 정부는 카마라쿠의 이사 계획을 발표했다. 카마라쿠가 너무 자라 청계천은 비좁아졌다고 했다. 사람들은 열광했다. 카마라쿠가 한강에 온다니! 출퇴근을 할 때마다 카마라쿠를 볼 수 있다니! 그 때쯤 카마라쿠는 거의 종교가 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소원을 말할 때 ‘카마라쿠’라는 단어를 마침표처럼 붙였다. “우리 아들이 서울대에 합격하게 해주세요, 카마라쿠!” 라든가 “올해에는 꼭 고시에 붙게 해주세요, 카마라쿠!” 등의 말을 쉬이 들을 수 있었다. 대통령도 마찬가지였다. 대중 앞에서 연설을 할 때면 그는 “안녕하십니까, 카마라쿠!”라고 인사했고 사람들은 열광했다. 카마라쿠, 카마라쿠, 라고 연호할 때 대통령은 제사장처럼 팔을 높게 띄웠다. 카마라쿠의 해였다.
카마라쿠는 무럭무럭 자랐다. 한강은 풍요롭지 않았으나 희망찼다. 모두가 ‘하면 된다’고 믿었고, 카마라쿠는 그 믿음을 먹고 성장했다. 노무직 아들이 사시에 합격했다는 소식이나 창업신화를 일군 촌놈의 이야기가 한강에 다다르면 카마라쿠는 푸른 꼬리 갈기를 흔들며 포효했다. 사람들은 그런 카마라쿠 앞에 줄지어 절을 했다. 열심히 절을 하면 자신도 그 포효의 주인공이 될 수 있으리라 모두들 의심치 않았다. 물론 그들 중에는 실패하는 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카라마쿠에게 절을 열심히 하지 않아서 그런거야’라고 질책했고, 스스로도 그런가보다 하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했다. 1997년이 오기 전까지는 그랬다.
1997년, IMF가 터졌다. 앵커는 부도난 회사의 이름을 끝도 없이 나열했고, 사람들은 다리에서 떨어져 죽었다. 죽은 자의 시체와 유족들의 통곡으로 한강은 썩어갔다. 카마라쿠는 시름시름 앓았다. 한강 둔치에는 카마라쿠의 비늘이 여기저기 떨어졌으나, 예전이면 금값으로 거래되던 그것을 누구도 줍지 않았다. 누군가는 카마라쿠를 증오했고 누군가는 카마라쿠에게 실망했다. 물론 카마라쿠를 믿는 사람들도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들조차도 카마라쿠가 없는 삶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뿐, 진짜로 그를 믿는 것은 아니었다.
갈수록 카마라쿠는 야위었다. ‘얼레리꼴레리’였던 놀림이 ‘니네 집은 동수저, 우리 집은 금수저’로 바뀌었을 때쯤, 그의 몸무게는 전성기 때의 반의 반 수준으로 졸아붙었다. 그리고 2017년 여름, 그는 제 머리를 한강철교에 찍어 자살했다. 붉은 피가 철근과 콘크리트를 물들였다. 전문가들은 그가 3주를 굶은 끝에 죽음을 택했다고 설명했다. 아무도 그를 믿지 않아서였다.
한 소설가는 그 날을 이렇게 묘사했다.
그것은 한 짐승의 끝이라기보다는 한 시대의 종말이었다. 알 수 없는 미래와 이루고 싶은 꿈으로 가슴 설레던 시대가 끝나버린 것이다. 이제 우리는 초등학생 때부터 스스로가 어떤 고만고만한 직장에서 고만고만한 삶을 살아갈지를 모두 알아버리고 마는 어른의 시대를 살아가야만 한다. 우리는 개천의 용이 자살했다고 이야기하지만, 분명히 그는 타살 당했다. 우리의 불신과 불신을 만든 사회가 그의 마지막 숨을 끊었다.
마포구청은 그의 시체를 조각내기로 결정했다. 청소의 효율을 위해서였다. 그의 갈기가 잘렸고, 눈과 살이 토막 났고, 그의 뼈와 핏물이 지워졌다. 그리고 마침내 아무것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