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
어제는 그가 죽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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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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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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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처음 언니를 본 날이 기억나요. 언니는 해바라기 꽃밭에 서 있었어요. 주인공이 진실을 알기 전 마지막으로 행복한 순간을 촬영하고 있었죠. 언니는 그날 자기가 무슨 표정이었는지 아세요? 인생의 모든 구김살을 제 손으로 매만지고 다려서 기어코 빳빳해진 종이를 받아든 사람의 얼굴이었어요. 슬픈 연기를 보고 감탄한 적은 많았지만 기쁜 연기를 보고 감동한 적은 처음이었어요. 사람이 저렇게 티 없이, 온전하게 행복할 수가 있구나, 싶어서 언니 얼굴만 보고도 눈물이 나더라고요.
사실 촬영장 가면서 씩씩댔거든요. 도대체 그 주연은 얼마나 잘났는지 꼬라지 좀 보자, 하면서요. 부끄럽지만 주연 진짜 열심히 준비했거든요. 결국 작은 조연자리나 받았지만. 그런데 그 날 자존심 상하게도 납득을 해버렸어요. 아 그래서 그렇구나, 하고. 그 날부터 촬영 내내 언니 씬을 따라다녔어요. 언니 연기가 너무 좋고 부러워서, 몇 번이고 잠을 설치고, 따라하고.
그리고 언니를 잊고 지냈죠. 한 2년을. 그러다가 전화를 한 통 받았어요. 배역 하나 있는데 소개해주겠다는 그 사람의 전화였어요. 기쁘게 달려갔어요. 거기엔 그와 언니가 있었어요. 좁고 어두운 방이었죠. 하지만 그 와중에도 언니 허벅지를 주무르는 손은 눈을 찌르듯 보였습니다.
박차고 나갈 생각이었는데 언니를 보니까 무릎에 힘이 풀렸어요. 언니조차도, 그런 연기를 하는 사람조차도 그래야 한다는 건, 그 정도 연기도 못 하는 저에게는 사형선고와 같았으니까. 그래서 그 옆, 언니의 반대편에 조용히 앉았습니다. 그렇게 몇 번을, 우리는 같은 상황에서 만났죠. 매번 서로 눈을 피했지만.
있잖아요 언니, 그 날 해바라기 꽃밭이 이뻤던 건 해바라기가 다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어서였을 거예요. 꽃 하나도 뒤꽁지를 보이고 있지 않았으니까, 그 드넓은 들판이 전부 곱게 노란 얼굴이었겠죠. 그 때는 그게 참 예쁘고 좋았어요. 맹목이란 어쨌든 눈물겹고 애틋한 법이니까. 딱 그만큼, 전 제 맹목이 어여뻤어요. 이 산업에 있으면 대개 그렇게 되잖아요. 십자가 앞에 못 박힌 예수처럼, 연기 앞에 제 삶을 바친 순교자들의 전당이 두고두고 전해져 내려오죠.
그런데요, 요즘은 그런 생각이 들어요. 한 명이라도 빨리 고개를 돌릴 줄 알았다면, 우리는 조금 더 빨리 그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올 수 있지 않았을까. 꽃밭에 있었던 게 우리 잘못은 아니지만, 그래도 어쩌면, 어쩌면.
언니,
언니랑 한 마디도 나눠보지 못한 게 아직도 후회가 돼요. 그래도 같이 손을 잡고 괜찮아, 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요. 그래서 오늘 그의 죽음을 보고 얼싸안을 수 있다면, 세상이 ‘독한 년’이라고 손가락질해도 우리 둘만은 광복이라도 맞은 양 줄줄 울 수 있으면 좋았을 텐데요.
그 날 책상 밑으로 바들바들 떨던 언니 손가락이 자꾸만 꿈에 나와요. 얇고 흰 손가락이요. 말을 걸지 못해서 미안해요, 언니. 혼자 가게 해서, 미안해요.
또 올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