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의 삶>을 함께 읽으며
692쪽. 첫 시즌 세 번째 책인 <니체의 삶>은 무려 692쪽이었다. 이렇게 두꺼운 책을 내 손으로 사 본 것도 처음인데, 심지어 그 주인공이 니체라니. 철학과도 거리가 멀었던 나로서는 책을 읽기 전 설렘보단 두려움이 앞섰다.
책의 두께와 주제의 압박으로 참석율이 낮을 것이라는 우려와 달리, 꽤 많은 멤버가 독서모임에 참석했다. 첫 주제는 ‘600쪽을 읽는 데에 걸린 시간과 환경’이었다. 나 같은 경우, 책을 느리게 읽는 편이라 시험 범위를 나눠 공부하는 학생처럼 목차를 보고 계획을 짜서 거의 한 달에 걸쳐 조금씩 책을 읽었는데, 평소처럼 모임 직전에 책을 펼친 사람들은 하루에 6시간 넘게 읽어야 했다는 이야기가 많았다. 사람마다 차이는 있었지만, 책의 분량 때문에 기본적으로 8시간 이상을 독서에 투자했다는 점은 모두 같았다.
다들 바쁜 일상 속에서 두꺼운 책을 읽느라 힘들었을 것 같았지만, 의외로 이런 경험이 너무 좋았다는 의견이 공통적이었다. 이렇게 긴 시간 동안 하나의 콘텐츠에 몰입해 본 것이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알 수 없는 성취감이 느껴졌다 등 온갖 긍정적인 후기가 쏟아졌다. 마치 집단 도파민 치료의 현장에 온 기분이었다.
영화와 드라마는 10분짜리 요약 영상으로 보고, 10분짜리 영상은 2배속으로 보며, 3초 안에 시선을 사로잡는 영상이 가득한 숏츠의 시대에, 8시간 넘게 두꺼운 책 한 권을 읽는 것은 분명 느리고 비효율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효율적으로 정보를 얻은 것 같지만, 돌아보면 남은 게 없다는 느낌이 자주 드는 짧은 콘텐츠와 달리, 이 책을 읽은 뒤엔 콘텐츠 자체를 제대로 소비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 경험이 내가 콘텐츠를 보는 진짜 이유였는데, 그걸 잊고 있었구나 싶었다.
물론 두꺼운 책의 매력을 느낄 수 있었던 이유가 단순히 책이 두꺼웠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책 자체가 읽기 쉽고 재미있게 쓰인 책이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생각했을 때 이 책에서 두꺼운 책의 매력이 잘 드러난 이유는 <니체의 삶>이 한 사람의 일생을 기록한 전기이기 때문이다. 앞부분을 읽을 때에는 모르는 정보가 많고 어린 시절에 대한 이야기이다 보니 집중력이 떨어질 때도 있었다. 솔직히 꾸역꾸역 읽는 느낌에 가까웠다. 하지만 차곡차곡 쌓여가는 인물에 대한 이해 덕분에 뒷부분으로 갈수록 니체의 이야기가 훨씬 풍성하게 느껴졌다. 전기라 책이 두꺼운 만큼 그 인물의 인생도 세세하게 담겨있기 때문이었다. 어린 시절의 경험이 이후 니체의 인생에 어떤 식으로 영향을 주었는지 생각하며 책을 읽다 보니, 어느새 분량의 압박은 사라지고 즐거움만 느껴졌다.
인물을 이해하다 보니 인간적인 모습에 쉽게 공감할 수 있었고, 멀게만 느껴졌던 니체가 가깝게 느껴졌다. 니체가 쓴 작품을 읽어 본 적이 없어도, 환희와 고통이 오가는 니체의 인생을 따라가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의 철학을 이해할 수 있었다. 유명한 작품이 탄생하는 순간들에는 그 작품을 읽지 않았음에도 감동을 느꼈다. 니체가 어떤 경험으로 인해 그 순간까지 왔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추상적이고 어렵게 느껴졌던 철학이 실질적인 경험으로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두꺼운 책에 대한 두려움을 함께 극복해 냈고, 그 매력에 푹 빠지게 되었다. 이후에도 1056쪽의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760쪽의 <일론 머스크>, 648쪽의 <사피엔스> 등 읽고 싶었지만 두꺼워서 엄두를 내지 못했던 책들을 골라 읽었다. 물론 모든 책이 <니체의 삶> 만큼 매력 있지는 않았지만, 앞으로 책을 선택함에 있어서 두꺼운 책을 과감히 고를 수 있는 용기와 두꺼운 책만 줄 수 있는 매력에 대한 기대감을 얻은 것만은 확실하다. 그리고 이런 변화는 일상의 다른 부분에서도 힘이 되어줄 거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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