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관이 서로 다른 사람끼리 소통하며 공통의 목표를 이루는 것은 그 목표가 간절할수록 가혹한 과정을 초래한다"
사회생활에서 가장 힘든 부분을 꼽으라면 인간관계를 꼽을 것이다. 이직을 한 지금의 회사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신입사원과 마찬가지로 입사했고(첫 직장 경력이 다른 직종이기에), 내가 속한 부서의 매니저는 같은 시기에 진급해서 처음으로 매니저가 되었기에, 그에게는 내가 첫 신입사원이었다. 나의 업무방식은 가능, 불가능한 테두리와 목표를 알려주면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하는, 쉽게 말해서 알아서 잘하는 스타일이다. 하지만 나의 매니저는 엄청난 의욕과 함께 본인 스타일의 업무방식을 요구했다. 그리고 거친 말투와 함께 욕설도 서슴지 않았다.
이직 후 첫 1년은 지옥이라고 했는데 나는 통상적인 지옥에서 불지옥으로 두배는 가혹한 1년을 보내게 된 것이다. 그중 가장 못 견뎌했던 것은 말투였다. 납득가지 않는 업무지시와 함께 거친 말투는 항상 가슴에 비수처럼 꽂혀왔다. 그리고 집에 가서 누우면 저녁 11시, 녹초가 되었지만 상처가 되는 말들이 머릿속을 맴돌며 계속 나를 찔렀다. 그렇게 몇 개월을 버텨보다 결국 퇴사를 결심했다. 힘들게 들어온 직장이기에 고민을 많이 했고, 목표한 학자금이나, 생활비 대출을 다 갚지 못한 상태였지만, 더 이상은 못할 것 같았다.
퇴사하기로 마음을 먹으니 그렇게 홀가분할 수 없었다. 그만둬야만 하는 온갖 이유가 떠오르며 마치 자동 합리화 시스템이 작동하듯 알아서 합리화를 해대기 시작했다. 과거 한 번쯤 읽어본 듯한 철학책이나, 인간관계 책의 굵직굵직한 한마디들을 가져와서 자동으로 합리화를 해대며 퇴사 결심을 굳히는데, 참 신기하기도 했다.
나는 특별한 날에는 일기를 썼다. 정말 행복할 때, 너무 아플 때, 슬플 때, 또 세상에서 도망칠 때, 싸울 때, 이겼을 때 등 일기를 쓴 이유는 모두 달랐지만, 목적은 같았다. 미래의 어느 순간에, 읽어보며 그때를 떠올리기 위함이었다.
퇴사 결심을 한 오늘은 사회에서 도망치기로 결심한 처참한 날이었다. 합리화는 했지만, 이 순간을 기록해야 할 것 같았기에 일기장을 펼쳤다. 펼친 일기에는 글씨만 봐도 어떤 내용인지 알 법한 과거의 순간들이 기록되어 있었다. 뜨겁게 사랑했던 순간, 섣불리 이별을 고해서 고구마를 300개를 먹은 듯했던 순간, 슬펐던 일들, 사회에서 겪은 실패와 배움들……. 과거 기록들을 읽어보며 당시의 감정에 휩싸여 '이럴 때도 있었지' 하며 추억에 젖어들고 있었다. 그러던 중 어떤 분노의 기록에서 시선이 멈췄다.
16년 4월 12일
로스쿨 스터디는 정말 최악의 인재풀이다. 몇 번을 해봤지만, 이렇게 약아빠진 인간들이 많은 곳은 정말 처음이다. 알바 하면서 알게 된 양아치 같던 얘들도 이렇지는 않았는데, 정말 본인과 비교해서 조금만 떨어지면 교묘하게 비꼬는 것은 기본이고, 자기의 의도를 한 번에 말하는 경우는 절대 없다. 다 남들 위하는 척, 왜 그렇게 본인을 포장하는 데에 골몰하는 걸까? 혹시 변호사가 되려는 게 본인의 부족한 자존감을 채우기 위해서일까? 기득권으로 올라가려는 인간들 대부분이 이런 인간들이라 사회에 더러운 일들이 많은 걸까? 오늘도 스터디에서 거슬리는 놈 하나가, 교묘하게 자기가 원하는 시간대로 스터디를 옮기려고 “다들 스터디 시간이 늦어서 끝나면 가기가 힘들죠?”라는 개소리로 포문을 열었다. 여태 그럭저럭 잘 참아왔지만, 나도 모르게 툭 튀어나왔다. “왜요 시간 옮기고 싶으세요?”, 그놈은 당황해하며 다른 스터디원 핑계를 대며 그분이 막차 타고 가는 게 안쓰럽다며 또 개소리를 했다. 그래서 난 당사자에게 괜찮냐고 물어봤고 그 사람은 당연히 괜찮다고 했다. 이후 그놈은 열이 받았는지 또 저번처럼 돈 써서 인강을 듣자고 했다. 내가 저번에 고시원 총무 하면서 생활비 아끼고, 빚 갚고 겨우 산다고 말한 것 때문에, 못할 걸 알고 하는 소리다. 이런 의도를 알아서인지, 아니면 내가 억측하는 건지, 뭐가 되었건 신경 쓰는 것 자체가 너무 짜증 난다.
혼자 가파른 산을 오르는데 정말 한발 한 발이 내딛기가 너무 힘들다. 신발도 너덜너덜하고 배도 고프고 너무 힘이 든다. 안 그래도 힘든데 가벼운 가방 메고, 신발도 좋은 거 신은 놈이 저 앞에서 나한테 돌을 던지며 오지마 오지마 하며 발악하는 것 같다.
힘내자, 나를 믿자, 할 수 있다. 매일 입 밖으로 내뱉으며 꾸역꾸역 걸어 올라가는 게 꼭 내가 나를 들고 가는 것 같다. 그래도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거잖아 믿는 거, 옛날처럼 한 번은 기적을 가져다주겠지, 오늘도 꾸역꾸역 뱉어본다. 할 수 있다…..
16년 4월 27일
이제 좀 살 것 같다.
갈등의 끝엔 파국이 많았는데 이번엔 꽤나 괜찮은 결말이 난 것 같다.
어제 스터디를 하면서 그놈 말 하나하나가 거슬렸다. 전부 나를 교묘하게 비꼬는 듯한 말투였기에 짜증이 났고, 그런 말의 의도 하나하나를 신경 쓰는 것 자체가 싫었다. 내가 너무 예민한 걸까? 아무튼 이렇게 스트레스받으면서 꾸역꾸역 하느니, 그냥 혼자 해야겠다 싶어서 일찍 나와버렸다. 그런데 걸어오다가 길바닥에 뭔가 움직이는 것을 봤다. 작은 참새 같았다. 이 참새는 얼른 안 날아오르고 사람들이 지나다닐 때마다 여기로 조금, 저기로 조금 점프를 하면서 도망 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우르르 오니깐 조금 높이 날아서 가로등 위로 올라갔다. 이상하게 시선이 가서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
이놈은 언제 날아갈까? 그냥 날아가면 이리저리 도망가지 않아도 될 건데, 아니면 높은 데로, 사람 없는 데로 가면 될 건데, 아니 사람 없는 데가 세상에 없으려나…… 저녁이라 어두워서 불빛이 있는 곳만 기웃거리는 걸까? 그 작은 녀석은 한참을 가로등과 바닥을 오가며 사람들을 피해 다녔다. 그리고 더 이상 못하겠다는 듯이 힘차게 점프해서 저 멀리 날아가버렸다. 그 녀석이 날아간 하늘을 한참 동안 멍하니 바라봤다. 마치 내가 허공에서 사라진 것처럼 마음이 후련했고, 내 안에 있던 쓰레기들이 텅 비어버린 듯했다.
작은 새를 보고 고시원에 들어오자마자 나는 한참을 잊고 있었던 명상을 했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해법을 찾은 것처럼, 편하게 눈을 감고, 한걸음 한 걸음 회전 계단을 내려가는 상상을 하며, 집중했고 오늘 저녁에 봤던 그 작은 새를 떠올렸다. 그 새는 마치 나와 같았다. 사람들의 발걸음에 겁먹고 이쪽저쪽으로 피해야 했고 유일하게 쉴 수 있는 곳은 바로 위에 있는 얇은 가로등뿐이었다. 나 또한 작은 자극들에 예민하게 굴었고, 홀로 세상에서 힘들게 고군분투하고 돌아온 뒤에는, 이 좁고 불편한 고시원에서 몸을 뉘었다. 나도 이제 그 녀석처럼 하늘로 날아가고 싶었다. 몸은 그럴 수 없지만, 적어도 마음만이라도 가볍게 날아가고 싶었다.
다 괜찮은 척, 강한 척 살아내고 있었지만, 남모르게 상처를 많이 받았고 지쳤던 것 같다. 그래서 더 이상 상처입지 않기 위해 나를 꽁꽁 에워쌌고, 무거운 삶을 살고 있었다.
이제 다 내려놓고 날아오르면 마음이 편안해질 것 같았다. 그러기 위해선 그 작은 녀석이 했던 것처럼 힘차게 바닥을 박차고 올라가는 것뿐이었다. 그리고는 상상했다. 지쳤지만 마지막 남은 힘을 짜내서 뛰어올라 하늘로 날아오르는 상상을....... 딱딱한 건물들, 자극적인 불빛, 시끄러운 자동차 경적소리, 무서운 사람들의 발바닥....... 모든 것이 멀어지며 작아졌다. 마침내 그것들에서 시선을 거두고 위를 봤을 때, 푸르른 하늘만이 보였다.
바닥을 박차고 날아오르며, 나를 아프게 한 모든 것들이 점점 작아지고 결국에는 작은 점이 되었다. 나는 고작 저런 작은 점들을 무서워하고 두려워하며 벌벌 떨었음을 자각하며 조금씩 자유로워지는 의식을 느꼈다. 그리고는 고요해졌다 한없이...... 점점 날아가는 이미지마저 없어졌고, 그렇게 한참을 있다가 눈을 떴을 때 나는 조금은 달라져 있었다.
오늘 난 그놈을 봐도 아무렇지 않았다. 어제 명상 이후 이 멍하고 세상과 멀어진 느낌을 유지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기에 그놈이 무슨 말을 하건, 그것에 신경을 쓰지 않으려 했고 오직 나에게 집중하며 흘려버릴 수 있었다. 관심이 없어지면 놀리는 것도 재미가 없어지는 것인지, 아니면 뭔가 변한 걸 느꼈는지, 몇 번 비꼬더니 나중엔 나를 자극하는 모든 말들을 멈췄다. 그리고 모의고사 성적마저 괜찮게 나왔다. 그리고 이상하게 이놈이 더 이상 날 자극시키지 않을 것이란 묘한 확신마저 들었다. 세상이 이놈을 시켜서 나에게 '비워냄'을 배우게 만든 것은 아닐까 생각하며 아주 기분 좋게 지금 이 글을 쓴다.
“세상아 배웠으니깐 더 이상 나를 괴롭히지 말거라, 나도 잊지 않으마!!!!”
다시 2019년으로 돌아왔다. 드라마틱한 변화의 순간들이 떠오르며, 꼭 나에게 이렇게 해보라고 과거의 내가 지금의 나에게 말하는 것 같았다.
“너 또 잊었어? 그렇게 배워놓고?”
곧장 앉아서 과거의 내가 시키는 대로 눈을 감았다.
바쁜 도시 속에서 작은 말 한마디에 자극을 받던 내 모습에서, 이제 하늘로 날아오르며, 건물, 불빛들에서 멀어지고, 세상의 모든 자극들이 점처럼 작아지는 상상을 했다. 그렇게 지금의 자극들을 나에게 상처 주지 못하는 작은 점들로 만들어 내고 있었다.
주말의 명상 끝에 현실과 멀어진 기분으로 월요일을 맞았다.
전반적으로 모호했지만, 분명한 것은 퇴사할 마음은 사라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세상이 변한 것은 아니었기에 이후에도 조금씩 나에게 상처가 되는 말들은 이어졌다. 하지만 그 전과는 확연히 달랐다. 별것 아닌 자극이라는 것을 알고 난 후의, 그의 말은 나에게 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비록 뾰족한 도시 속에서 다양한 자극들을 마주해야 했지만, 이것들은 내가 날개를 펴서 날기만 한다면 고작 작은 점이 될 뿐이란 것을 알았기 때문에 난 초연할 수 있었다.
그 이후 상처가 될 법한 일들이 나에게 영향을 끼치려 할 때, 나는 앉아서 명상을 했다. 그리고는 큰 자극들을 점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렇게 작은 자극에 우르르 몰려가는 내 감정 들을 떼어내고 보니 이해심 같은 것들이 밑바닥에서 조금씩 올라왔다. ‘그 사람이 왜 그렇게 이야기했지?’라는 생각으로 그의 과거 행적을 확인하며 그를 이해하려 노력했고, ‘나의 문제는 없는지?’, ‘그의 원칙은 무엇인지?’, ‘거친 말의 진의가 무엇인지?’ 등을 확인하며 나는 어느새 그를 이해하려 노력했다 아니 노력할 수 있었다. 1년 반이 지난 지금은 거짓말처럼 정말 좋은 매니저라고 생각하는 단계까지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좋은 면들이 자꾸 보이기 시작했고, 지금은 서로가 존중하며 믿을 수 있는 관계가 되었다.
비현실적인 해피엔딩으로 비칠 수도 있지만 사실이며, 힘들 때 높이 날아오름으로써, 내가 사회에 있는 시간은 또 한 번 연장된 듯 보였다.
앞으로 또 한 번 못 버티도록 힘든 일이 있을 때는, 굳이 일기를 펴보지 않아도 떠올릴 것이다.
‘너무 힘들 때면 다시 힘내서 날아오를 때가 되었다.’
이 글 초반은 비공개 카페에 일기처럼 썼던 글이었다. 너무 화가 나고, 짜증도 나면서 억울했기에 매니저 욕을 갈겨놓곤 했다. '왜 저따위로 말하지?', '왜 저따위로 일하지?', '이기적이다', '비효율적이다' 등 납득 안 갔던 모든 것을 반박하며 화풀이를 했었다. 그런 내가 지금 이 글을 쓰면서 이런 의문까지 들었다.
'내가 우리 팀장을 저 정도로 싫어했다고?, 불과 1년 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왜냐하면 지금 있는 매니저들 중 가장 나에게 잘 맞는 사람이라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 일으키지 않고, 일만 잘하면 관섭하지 않고, 내 재량을 100% 보장해주는 사람. 심지어 가식과 대접을 바라지도 않는다.
조금 더 욕심부린다면, 바라는 게 있겠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상사에 가까웠다.
누군가는 말했다. "인간은 절대 안 변해"
난 말하고 싶다. "인간은 안 변하는데 관계는 변할 수 있어. 그것도 드라마틱하게"
사진출처
https://notefolio.net/gorokeyo/529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