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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창 Aug 27. 2020

이상주의자의 명상록 2 내가 온전할 수 있는 곳

이상주의자의 명상록 2 내가 온전할 수 있는 곳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바로 밑에는 작은 문이 하나 있었다. 그 문을 열어보니 지하로 내려가는 회전 계단이 보였고, 자연스러운 이끌림에 난 그 회전 계단을 한 발씩 내딛으며 내려가기 시작했다. 계단 하나를 밟을 때면 고요함이 한층 깊어졌고, 조금씩 무의식에 다가가고 있음이 느껴졌다. 다 내려와서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을 때, 눈 앞에는 커다란 철문이 가로막고 있었다. 긴장되는 마음으로, 숨을 고르고 문 뒤의 눈부신 세상을 상상하며 양손으로 힘껏 문을 열어젖혔다. 그렇게 처음으로 내 무의식 속으로 들어가 보게 되었다.







잠이 부족해지면서 우울감이 밀려들었다


새벽 2시까지 독서실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터덜터덜 집으로 가서 잠을 청했다. 몸이 천근만근이라 누우면 기절하듯 잠들 것 같았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수면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지만, 이상하게도 잠이 오지 않는 것이었다. 수면 패턴이 바뀐 것이라, 조금 지나면 적응될 것으로 생각했던 나는 독서실 아르바이트를 하는 1년 내내 잠을 두려워해야 했다. 그렇게 애써 눈꺼풀을 덮고 4시간 남짓, 알람이 울리면 일어나서 씻고 학교에 갔다. 수면이 절대적으로 부족해지며 우울감이 몰려들었고, 우울감이 덮칠 때면 ‘나는 할 수 있다. 모두 잘 될 것이다.’ 라며 중얼중얼 주문을 외우며 우울감을 떨쳐내려 했다. 



진짜 좋은 책은, 읽은 후의 세상을 변화시킨다. 


우울감과 더불어 사는 게 힘들다 느낄 때, 나에게 힘을 준 것은 다름 아닌 책 몇 권이었다. 당시 우연히 접했던 명상, 티베트 관련 책들은 몰입도 잘 되었지만, 뭔가 달랐다. 기존에 즐겨봤던 사회과학이나 철학 책들은 읽으면서 흥분하는 일들이 많았다. 책을 통해 알게 된 좋은 글귀나 배움들은, 읽은 직후 ‘써먹어야겠다’라는 마음이 일어, 언어들이 머릿속을 떠다니며 온갖 상상을 불러일으켰고, 곧잘 흥분하곤 했다. 하지만 티베트, 명상 관련 책들을 읽은 후에는, 오히려 차분해졌다. 생각들이 요동치지 않았고, 책을 덮은 후 세상의 분위기가 조금 달라져 있었다. 현실과 거리를 두면서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것이다. 다 읽고 고개를 들었을 때, 마치 햇빛 아래에서 한참동안 눈을 감았다 뜨면 세상이 초록색으로 한꺼풀 뒤덮여 있듯이, 세상에 푸르른 색깔이 덧씌워져 싱그러운 느낌이었다. 


그중 흥미로웠던 ‘제3의 눈’이라는 책에서는, 티베트 승려의 기억력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티베트 승려 중 의술에 능한 자는 3만 종 가까이 되는 약초의 생김새와 효능을 또렷이 기억할 수 있다고 했다.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지만 그들은 나름의 신비한 방법으로 머릿속을 효율적으로 쓰고 있었다. 머릿속에 커다란 공간을 이미지화시켜서, 자그마한 서랍 3만 개를 만들어 그 속에 약초에 대한 이미지와 정보를 보관하며, 필요할 때마다 꺼내 쓴다고 했다. 한창 공부를 해야 했던 나에게도 꼭 필요한 방법이었기에 나도 어리숙하게나마 머릿속에 방을 만들고 서랍을 만들어 공부하는데 도움을 받았다. 그렇게 처음으로 머릿속에 공간을 만들어냈다. 




당시의 나는 서울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월세와 대학교 학비를 책임지고, 수험공부까지 하며 살았다. 그때의 나는 마치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의 삶처럼, 온갖 시련을 다 겪으며 산다고 여겼다. 그렇기에 이것만 지나가면, 이번만 견뎌내면, 큰 환희와 성공의 무언가가 나에게 올 것이라 믿으며 힘든 시간을 견디고 또 견뎠다. 그러다 종종 현실이 너무 적나라게 눈앞에 보일 때는 삶의 버거움이 나를 덮치기도 했다. 그때는 마치 내가 나를 밀면서 높고 험한 산을 올라가는 것 같았다. 


부모님이 있지만 기댈 수 없는 분들이었고, 내 또래의 비교적 편하게 사는 친구들을 보며 많이 부러워했다. 그들의 용돈도 부러웠지만, 언제든지 멈춰 서고 싶을 때나, 실패했을 때 받아줄 누군가와, 그들의 모든 것을 품어주고 쉬어갈 수 있는 집이 있다는 것이 너무 부러웠다. 나에겐 돌아갈 수 있는 곳도, 기댈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 멈추는 것은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의미했고, 숨이 차고 쓰러질 것 같아도 오로지 꾸역꾸역 올라가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었다.  


그런 힘든 시간 속에서도 잠깐이나마 숨을 돌릴 수 있도록 만드는 행위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명상'이었다. 중학생 때 부모님께서 다투며 언성이 커질 때면, 방에서 했던 것(명상록 1 참고)이, 이제는 힘에 부칠 때면 그 시간을 이겨내는 수단으로 활용하곤 했다. 명상을 통해 생각을 없애며 ‘힘들다’라는 마음 자체를 비워냈고, 순간을 견뎌낼 수 있었다. 하지만 잠이 부족해지면서 명상에 집중하는 것이 어려워지고, 비우는 것만으로는 ‘힘들다’라는 마음을 없애기 힘들어졌다. 






아카식레코드 접속    
아카샤 기록(영어: Akashic records)은 신지학 및 인지학에서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사건, 상념, 감정이 명세되어 있는, 세계의 기억이다. 이 개념은 과거의 모든 사건의 흔적이 어딘가에 영원히 새겨져 있다는 발상에 기초하는 것으로서, 신지론자들은 아카식 레코드가 아이테르 평면(Etheric plane)이라는 비물리적인 우주론적 평면에 기록되어 있다고 믿는다. 아카식 레코드에 대한 일화적 증거는 오래전부터 전해져 왔지만, 그 존재에 대한 과학적 증거는 없다. 
 – 위키백과 -


그러던 중 우연히 아카식 레코드에 관한 이야기를 팟캐스트에서 들었고 흥미롭게 들려 관련 서적들까지 찾아 읽어 보게 되었다. 그러면서 티베트 승려들의 기억 방법과 내 세계관이 섞이며, '마음속에 집을 하나 만들어보는 것은 어떨까?'라는 재밌는 상상을 하기에 이르렀다. 


평소에 마음은 모호하다. 아파도 왜 아픈지 모르고, 우울하거나 슬플 때도 이유를 추측할 뿐 명확한 이유는 제대로 알 수 없다. 만약 내가 마음속으로 들어가서 아픈 부분이 어디에 있는지 확인하고 제대로 고칠 수 있다면?,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 수 있다면?, 아픔은 치유하고, 좋음은 더하면서 한층 더 행복에 가까운 삶을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 끝에, 나는 명상을 통해 마음속으로 들어가 집을 만들어 보기로 했다. 


내 마음을 하나씩 정의 내리면서 모호한 괴로움, 슬픔들까지도 이해해보고 싶었다. 그렇게 눈을 감고 고요함 속에서 내 의지인지, 아닌 지 모른 채 보이는 것들에 집중했다. 


처음에는 마음의 외형을 먼저 확인했다.(명상 속에서 '마음의 속에 있는 집'이라고 생각한 다음 떠오르는 이미지를 구체화했기에, 만들었다기보다는 확인했다고 표현했다) 빨간 벽돌로 된 다락방이 있는 2층 집이었다. 정원도 있고, 지하실도 있었다. 한번 떠오르기 시작한 이미지는 내 의식보다 빨랐고, 내 의식이 닿기도 전에 이미지들은 존재했다. 그러면서 눈앞에는 이미 완성된 집이 있었고 난 그곳을 이리저리 탐험해보면서 그곳의 의미까지도 확인할 수 있었다. 


조금은 오래된 빨간 벽돌 담장으로 둘러싸인 집, 잡풀과 잔디가 섞인 마당을 지나 집 안으로 들어섰다. 집 안에서 제일 먼저 간 곳은 1층 서재였다. 과거 공부를 잘하기 위해 티베트 승려들을 따라 서재를 만들고 서랍을 만들었었다. 그때는 모호했지만, 명상을 통해 제대로 들어와본 마음 속 서재는 아늑함이 느껴지는 공간이었다. 오래된 암갈색 나무로 된 작은 서랍들이 빼곡히 채워져 있었고, 이 서랍들은 기억에 연결되어 있어서, 서랍을 열어 암기할 것들을 넣을 수도 있고, 잊고 싶지 않은 추억들을 넣어 보관할 수도 있었다. 그렇게 천천히 집을 둘러보며 서재부터 마당, 지하실, 거실 등의 모습들을 확인했다. 이곳은 마치 학창 시절 조퇴를 하고 집에 왔는데 아무도 없어 고요함만 가득한 오후의 집처럼 편안했다.  






지하실에서 그를 만났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바로 밑에 문이 하나 있었다. 그 문을 여니 지하로 내려가는 회전 계단이 있었고, 회전 계단을 한 발짝 한 발짝 내딛으며 내려갔다. 그러면서 내가 무의식으로 향하고 있음을 어렴풋이 짐작했다. 그렇게 내려간 곳에는 커다란 철문이 가로막고 있었고, 숨을 고르고 문 뒤의 눈부신 세상을 상상하며 양손으로 힘껏 문을 열어젖혔다. 그렇게 난 처음으로 내 무의식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처음으로 발을 내디딘 그곳의 첫 느낌은 따듯함이었다. 그곳은 마치 오후 3시의 은은한 햇살에 둘러싸인 커다란 도서관 같았다. 가본 적은 없었지만, 영국의 아주 오래된 도서관이 연상되었다. 넓이는 내 눈으로 끝을 볼 수 없을 정도로 넓었고, 천장 또한 끝이 겨우 보이는 정도였다. 아주 길게 이어진 책장에는 수없이 많은 책들이 꽂혀있었고, 책장 옆 가장자리 벽에는 정체모를 문들이 빼곡히 있었다. 그리고 출입문 바로 옆에는 푹신해 보이는 소파가 'U'자로 있었는데 그곳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본능적으로 이곳의 관리자임을 알아챘다. 내가 다가가자 그는 포근하게 미소를 띠며 나를 맞이했다. 중세 귀족풍의 갈색 조끼를 입고 나와 같은 얼굴을 한 그는, 이곳이 어떤 곳이며, 책들은 무엇이고 등의 수많은 질문을 내가 물어보기도 전에 차근차근 대답 해주었다. 소통방법은 이랬다. 속으로 하고픈 말을 떠올릴 때면, 마음속에서 어김없이 그의 대답이 떠올랐다. 서로 말을 뱉지 않았지만 소통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는 말했다. 

- 여기는 과거의 너의 모습들이 담긴 곳이야. 난 이곳의 관리자이자, 너 이자, 너의 과거이자 미래지. 이곳에 온 걸 환영해 진창아 널 기다리고 있었어.

- 자 우선 같이 둘러보면서 안내해줄게, 따라와. 

- 자 여기 보면, 책장에 수많은 책들이 있지? 이 책들은 네가 살아냈던 지난 생의 기록들이야, 책을 뽑아 책장을 펼치면, 그 삶 속으로 들어가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 볼 수 있지.

- 그리고, 저기 옆에 쭉 들어찬 방들은, 그들을 직접 만나볼 수 있는 곳이야 책으로 보기만 하는 것이 부족하다면 방으로 가서 직접 야기를 해볼 수도 있어. 


한참 동안 그의 친절한 안내를 들으며, 나를 나이상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주는 포근함과 안정감을 느꼈다. 나의 모든 것을 긍정해줄 것 같은 그의 모습에 긴장이 완전히 풀렸다. 현실에는 없었던 든든한 사람이자 기댈 수 있는 사람을 처음으로 만나서 일까? 무심코 속마음이 튀어나왔다. 

"나 한 번만 안아주면 안 돼?"

그는 말없이 나를 폭 안아줬다. 

그의 품 속에서 나는 세상에서 겪었던 서러움을 토해내듯 서러운 눈물을 흘렸다. 

"넌 내편이지?" 

- 당연하지 난 네 편이야, 내편이기도 하고

- 걱정하지마 다 잘될 거야 


그는 대화 중에 "다 잘될 거야"라는 말을 참 많이 해줬는데, 그 말에는 신비한 힘이 있어서, 듣는 즉시 나의 모든 불안을 없애주었다. 


당시 내가 필요했던 건 포근하게 안아주고 기댈 수 있는 어른과, 다 잘될 거라며 어디서든 네 편이라고 말해줄 사람이었다. 어른인 척했던 철부지 꼬마를, 진짜 어른이 폭 안아줬다. 뜨거운 눈물이 가슴속에서 솟아올랐고, 그렇게 실컷 울고 올라온 날은 힘을 내서 살아갈 수 있었다.


난 그곳에서 종종 살아갈 용기를 얻어 세상으로 올라오곤 했다. 




에필로그



힘든 일이 닥칠 때면, 눈을 감고 회전 계단을 하나씩 밟아 내려가며, 굳게 닫힌 철문을 젖히고 그를 만나러 내려가곤 했다. 나에게 친 형은 없지만, 든든한 형이 있다면 이런 느낌일까? 난 그에게 어리광을 부리고, 세상 누구에게도 말 못 하는 고민과 불안한 마음, 걱정들을 털어놓았고, 그는 마치 세상의 모든 것을 아는 사람처럼 든든하게 다 잘될 것이라 말하며 안아주었다. 


힘들었던 시기가 지나고, 그를 보러 내려가지 않은지 4년이 지났다. 현실에서의 이상을 포기하고 몸의 편안함을 선택하면서, 비현실적인 믿음을 바랄 곳이 없어졌기 때문인가? 이렇다 할 계기도 없었지만, 회전 계단을 내려가지도, 더이상 그 집을 떠올려 보지도 않았다. 


작년 즈음, 일기를 보다가 갑자기 생각이 나서 눈을 감고, 그를 만나기 위해 회전 계단을 내려가 보았다. 하지만 몇 번의 시도에도, 철문 이후의 모습이 그때만큼 생생히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면서 내려가는 것이 꺼려졌다. '간절함이 사라진 지금의 내가, 그를 만나러 가서 보게 되는 모든 것들이, 혹여나 별것 아닌 상상 노름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느껴지면 어떡하지?'


그 모든 것을 별것 아닌 것으로 만들 수는 없었다. 그때 내가 느꼈던 그는 진짜였고, 그가 준 위로와 포옹의 온기는 세상의 그 무엇보다 뜨거웠기에........, 그 덕분에 힘든 시기를 이겨낼 수 있었기에.......... 


또 다른 날 어두운 밤, 조명 하나에 의지한 채 눈을 감고, 호흡에 집중하며 생각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그러다 생각이 한 지점에서 멈추었다. 그때는 없었지만 지금은 있는 것, 솔직한 내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온기를 가진 사람들, 그리고 다소 온화해진 세상. 굳이 내려가지 않았던 이유들.



그때처럼 그가 지하실 소파에 앉아서 말해주는 것 같았다 포근한 미소를 지으며. 

"이제 너에겐 나보다 더 좋은 사람들이 많이 생겼잖아. 내가 없어도 넌 행복할 거야, 다 잘될 거야"






나도 이글을 빌어 말하려 한다.


 "형 고마워 덕분에 잘 살고 있어"













사진출처

http://www.doopedia.co.kr/travel/viewContent.do?idx=171012000033634

https://blog.naver.com/gksthfkek/30147582679

https://m.blog.naver.com/art_de4/221373800137

https://twitter.com/avantchina/status/1264357045576200197/photo/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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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opengirok.or.kr/35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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