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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밤 Jul 05. 2023

날 가장 힘들게 했던 건 영어가 아니다

끝내 극복하지 못했던 건



눈이 올 때마다 세상은 하얘지고,
내 마음은 까매졌다

캐나다에서 새해를 맞고 싶다는 아이의 소망에 따라 우리의 출국은 23년 1월로 미뤄졌다. 사실 난 최대한 빨리 떠나고 싶었다. 작년 12월에 겪은 폭설의 기억이 아직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밴쿠버에 온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모든 게 서툴렀던 그때, 갑자기 세상이 온통 하얀 눈으로 뒤덮였다. 겨울왕국에 온 것 같은 아름답고 신비로운 풍경이었지만, 제설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온종일 집에 있어야 했다. 온돌난방이 되지 않는 서늘한 집에서 눈이 녹기만을 기다리며 보냈던 그 시간들은 쉽게 잊히지 않는다.


캐나다의 수많은 도시 중 밴쿠버를 택했던 것은 날씨 때문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도착한 해에 30센티미터가 넘는 폭설과 매서운 강추위가 몰아쳤고, 난생처음 커다란 삽을 들고 집 앞의 눈을 치워야 했다. 그것도 몇 날 며칠을.


아이들은 온종일 눈썰매를 타며 신나 했지만 내 마음은 꽁꽁 얼어갔다. 추위는 내가 극복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울한 빗방울 소리를 멈추게 할 수는 없다


밴쿠버에서 꼭 필요한 물건은 단연코 방수용품이다. 11월부터 시작해서 여름이 오기 전까지 끊임없이 비가 내리기 때문이다. 한국의 장마철에 익숙했던 나로선 말로만 들었던 레인쿠버의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았다. 오후 4시부터 깜깜해진 거리가 쉴 새 없이 내리는 빗방울 소리로 가득 찼다.


창문을 두들기는 빗소리를 온종일 듣다 보면 물이 뚝뚝 떨어지는 박스 안에 갇힌 기분이었다. 뚝뚝뚝… 이렇게나 많은 비가 어디에서 오는 걸까. 그리고 이 빗방울들은 모두 어디로 흘러들어 가는 걸까.


그리고… 나는 지금 이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마음 깊은 구석에 숨겨져 있던 두려움이 빗방울 소리와 함께 자꾸 떠올랐다. 내가 이곳에 온 이유가 무엇이지? 와서 무엇을 하려고 했었지? 혹시 잘못된 판단을 한 것은 아닐까.


긍정적인 말들을 생각하며 떨치려 했지만, ‘불안한 나’와 마주하는 시간은 그 무엇보다 힘겨웠다.




같은 경험을 해도 기분이 좋을 때와 좋지 않을 때 겪은 것은 완전히 다른 기억으로 남는다. 소중한 하루가 ‘기분’에 의해 최고가 될 수도, 최악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한낱 미약한 인간인 내가 ‘하늘의 뜻’을 거스를 수 없다면,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뿐이다.


내가 바꿀 수 있는 유일한 것. 내 마음을 스스로 다스리는 것.


나는 날씨를 극복할 순 없었지만 불안하고, 두렵고, 도망치고 싶은 나는 떨칠 수 있었다.


그렇게 밴쿠버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나는 ‘또 다른 나’를 마주한다.


조금 더 성장하고, 조금 더 웃고 있는 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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