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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보라 Sep 14. 2020

내 잠옷은 예쁘고 좋아야 해

나를 사랑하기 위한 첫걸음


<1부 잠>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생각 중 하나는 퇴근길에 얼른 집에 가서 이불에 들어가 스르르 잠이 드는 상상을 하는 것이다. 특히 나는 추위에 약해서 겨울만 되면 이상하게 기운이 없는데 그럼에도 겨울을 버틸 수 있게 하는 힘은 추위에 떨다가 집으로 들어가 부들부들한 극세사 이불로 들어가는 ‘순간’이다. 그 순간만큼은 정말 세상을 다 가진 것 같다. 물론 여름에도 더위에 찌들어 있다가 샤워를 하고 얇은 이불을 덮고 누우면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된다.


 가족 외에는 다른 사람들과 살아본 적이 없어서 다른 사람들은 잘 때 무슨 옷을 입고 자는지 궁금하다. 나는 몇 년 전만 해도 도저히 밖에 입고 나갈 수 없는 낡은 티셔츠나 고등학생 때 입던 체육복같이 곧 버릴 옷들을 입고 자고는 했다. 사실 그것만큼 편하고 아무렇게나 입을 수 있는 옷은 없다.


 하지만 요즘 새로 들인 취미는 ‘돈 주고’ 잠옷을 사는 것이다. 1년 전, 길을 지나가다가 우연히 작은 토끼가 그려진 잠옷을 보고 홀린 듯이 구매해보았다. 당시 마땅히 집에서 입을 만한 낡은 옷이 없어서 의미 없이 산 것이었다. 그리고선 며칠을 새로 산 잠옷을 입고 잤는데 잘 준비를 할 때마다 이상하게 내 옷에 귀여운 토끼가 그려져 있는 것이 사랑스러운 기분이 들고 기분이 괜히 좋아졌다. 그 후로 계절별로 몇 의 잠옷을 돈 주고 샀는데 그때마다 만족도가 매우 높았다. 겨울 잠옷이라면 보송보송한 털의 촉감이 추위에 떨다 온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어주는 것 같았고 여름 잠옷이라면 얇은 천의 까끌까끌하거나 보드라운 촉감이 안정감을 주는 것 같았다. 단추가 달린 잠옷이라면 상의의 단추를 하나하나 잠그다 보면 바깥 기억으로부터 내 생각을 잠시 닫고 영업 종료하는 듯한 기분을 만들어 주었다. 곧 버릴 낡은 옷들을 잠옷으로 입었을 때와는 조금 다른 느낌이 드는 것이다.                                               


 사실 잠옷은 외출복과 가격이 비슷하거나 혹은 더 저렴한 편이다. 그럼에도 잠옷을 사는 것은 외출복을 사는 것보다 괜히 더 아깝게 느껴진다. 잘 때 입는 옷은 볼 사람도 없는데 굳이 돈 주고 사야 하나 싶은 것이다. 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밖에서 입는 옷을 아무리 비싼 돈 들여서 산들, 남들이 내 옷에 대해 돈을 들인 만큼의 관심을 갖지는 않는 것 같다. 당장 나만 해도 직장 동료나 친구가 오늘 무슨 옷을 입고 왔는지 떠올려보라고 하면 조금 힘들다. 그리고 기억이 난다 하더라도 남들이 입은 옷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깊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아마 다른 사람들도 내가 아주 튀는 옷을 입고 오지 않는 이상 내 옷 따위는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잠옷은 어떤가. 잠옷도 외출복을 고르는 만큼 신경 써서 골라야 하는 중요한 이유들이 있다. 물론 잠옷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옷은 아니다. 하지만 내가 보고 내가 기억한다. 특히 밖에 돌아다니는 것보다 집에서 휴식을 취하는 걸 더 선호하는 나 같은 사람들이라면 밖에 있는 시간보다 집에 있는 시간이 더 길기에 외출복보다는 잠옷을 더 많이 입고 생활한다. 또 하나, 외출복은 매일 갈아 입지만 잠옷은 며칠씩 계속 입는다. 마지막으로 잠옷을 고를 때는 외출복을 고르는 것과는 달리 남에게 보이는 옷이 아니기에 남을 신경쓰지 않고 오롯이 내 취향으로 고를 수 있다. 그러니 내 취향으로 신중하게 예쁜 스타일의 잠옷을 고르는 즐거움이 있는 것이다. 이렇게 타당한(!!) 이유가 있기에 잠옷에 돈 쓰는 것을 아깝게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거창한 것이 아닌 것 같다. 흔히 내 인생의 주인공은 자기 자신이라고 한다. 생각할수록 정말 맞는 말이다. 내가 없으면 나의 세상도 없는 것이니까. 그렇지만 사람은 사회적인 동물이기에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보일지, 다른 사람들은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 직장에서의 옷차림, 친구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장신구, 나로 기억됐으면 하는 향수 등을 사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다.


 그런데 나를 위한 잠옷 하나가 하루의 소소한 행복이 된 이후로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보일지 신경 쓰는 만큼 온전히 나를 위한 여유를 갖는 일도 굉장히 중요했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요즘 나는 나만 입는 잠옷, 나만 맡는 자기 전 바르는 바디로션의 향기, 나만 아는 내 방 안의 디퓨저, 나만 보는 내 방에 있는 작은 사진이나 소품들을 신중하게 고르는 것에 빠져 있다. 그러고 보면 나를 사랑하는 것의 시작은 사랑스러운 잠옷을 사는 것부터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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