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륭짱 Sep 23. 2023

순례 25일 차: 한 편의 시트콤(부제:喜怒哀哀)

26.9살 막바지에 떠난 산티아고 순례길

22/11/13 일요일 Walking D+23 & Stayed 2(Logroño, Leon)

Ponferrada (폰페라다) -> Vega de Valcarce (베가 데 발카르세) 약 40km


*순례길에서 가능하면 매일매일 일기를 쓰고자 했다. 왜냐하면, 하루만 지나도 그날의 감정이 그때와 같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날은 그럴 수 없었다.

워낙 많은 거리를 걸었고 사건사고도 있었기에 부득이하게 다음 날, 다음 마을에 도착해서 일기를 썼다.


喜 - 기쁠 희 / 순례 25일 차 : 기쁨 편


깔끔하고 모던한 인테리어의 폰페라다 숙소에서 완전체로 모든 멤버가 모였다.(aka 꽈배기) 좋은 숙소 덕분에 잠을 푹 잘 수 있었고 쾌적하게 몸을 씻을 수 있었으며 빨래도 깨끗하게 건조까지 할 수 있었다. 내가 말한 가장 기본적인 이 3가지가 매일 있을 수 없는 곳이 바로 순례길인데, 이날만큼은 모두 충족한 그런 날이었었다.

어찌 보면 너무 당연한 충분한 숙면(불편하지 않게 잘 수 있는 환경)과 따듯한 물로 샤워를 할 수 있는 깨끗한 화장실(변기와 샤워기가 있으며 성인 남자 1명이 들어가도 충분히 몸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씻을 수 있는 넓이의 공간), 그리고 세탁기(요즘엔 건조기도 딸린)가 있는 것이 일반적일지라도 이곳에선 일반적이지 않는 법이었다.


숙소 근처 마트에서 산 에그타르트와 뺑오쇼콜라(초코와 슈크림이 적당히 섞인)를 아침으로 먹고 다 같이 일찍 출발했다. 우리는 남은 거리와 향로미사를 고려해 볼 때 40km를 걸어야 하는 날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폰페라다 ~ 발카르세 구간을 한 번에 걷기로 결정을 했다. 이 구간은 큰 언덕이 없는 무난한 평지라고 해서 한번 도전해 보고자 나는 40km의 장거리임에도 불구하고 배낭을 메고 걷기로 했는데, 사실 거리가 길어서 두려운 마음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길이 험난하지 않고 평지이기 때문에 약간 할만하다고 생각을 했었다. (이게 나중에 큰 화근이 되었다.)


(왼) 아침을 먹고 (오) 일찍 출발했다


고도표에 나온 것과 같이 나름 무난한 길을 걷고 또 걸었다. 다행인 건 생각보다 자갈과 흙으로 뒤덮인 길이 많이 없었고, 대부분 포장된 아스팔트 길이었어서 초반에는 씩씩하게 배낭을 메고 잘 걸었다.


그렇게 계속 걷다 보니 어느새 남은 킬로미터가 198.5km였다!


기다리던 200km가 깨지고 앞자리 수가 바뀌니 이제는 정말 산티아고에 가까워진 것만 같았다. 마음이 참 싱숭생숭하며 꽤 기뻤다. 걷는 내내 날씨도 좋았고 간간히 바람이 불어 코로 들어마시는 공기가 상쾌할 따름이었다. 아침을 조금 이르게 먹어서 그런지 배가 많이 고파와서 길을 걷다 중간에 들린 cacabelos, Leon 이란 마을에서 점심을 먹었다.

사실은 처음 들어간 식당에서 퇴짜를 맞았다. 너무나 멋지고 근사한 식당이었는데 영업시간 전이어서 들어갈 수가 없었다. (이렇게 점심 먹기가 참 힘들다)

그렇지만 더 걸어가서 우리는 괜찮은 식당을 찾았고 끝내 맛있는 음식들을 먹을 수 있었다. 샐러드, 피자, 파스타, 빠에야까지 배고픈 우리들은 양껏 시켜 하나도 남김없이 싹싹 긁어먹었다.


맛있는 점심


밥을 먹고 조금이라도 쉬면 좋으련만, 아쉽게도 오늘은 제일 긴 거리를 걸어야 했기에 부지런히 움직였다. 그러다 "tvN 스페인 하숙"예능을 촬영했던 villafranca (빌라프랑카)라는 마을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우리는 여기서 조금 쉴 겸 촬영지도 가볼 겸 겸사겸사 이 마을을 들리게 되었다.

("스페인 하숙"을 볼 때는 내가 순례길을 걸으리라고는 전혀 상상도 못 했었다. 그저 하나의 재밌는 예능으로 치부했을 뿐)


"아~여기가 그곳이구나, 정말로 티비와 똑같네, 문이 정말 크다!"


촬영지를 마주했을 땐, 마냥 신기한 마음뿐이었다.


위로 올라가자 넓은 마당과 포스터를 찍었던 작은 문이 보였다. 아마 실내로 들어가는 입구(배우 유해진 씨가 순례자들에게 쎄요를 찍어주던) 였던 것 같은데 그땐 문을 막아놓아 들어갈 수가 없었다.(아마 지금도 그럴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포스터 사진을 따라 찍으며 놀았고 근처 바르에서 잠시 쉬며 체력을 보충했다.

포즈를 따라 하고 준비하는 과정이 너무 재미있었다.


이때까지는 말이다.


나(배우 차승원씨 롤) .. 이때까지는 웃었다..


哀 - 슬플 애 / 순례 25일 차 : 슬픔 편


테라스 의자에 앉아 쉬며 다시 이동하려고 일어났는데 몸과 발이 무거웠다. 아마 이때부터 슬슬 지쳤는지도 모르겠다. 안쪽 발목에는 힘이 잔뜩 들어갔으며 그 때문에 발걸음이 차차 무거워져 아스팔트인 길도 내게는 조금 버거워졌다. 배낭 탓을 하고 싶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배낭이 있고 없고 가 체력적으로 차이가 많이 나는 것 같았다. 이제부터는 진짜 정신력 싸움이다라고 생각하며 천천히 걸어 나갔다.


그러다 한 마을에서 라면을 판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계속되는 걸음과 무거운 배낭에 지칠 때로 지친 나는 옆에 있는 K언니와 한국에 가면 먹고 싶은 음식들을 서로 나열하며 라면을 먹겠다는 의지로 그 마을까지 꾹꾹 걸어갔다.


낮엔 이렇게나 이뻐요


그러나,


그렇게 찾아간 식당은 문이 닫혀있었다. 정말 그 허무함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마치 고3 때 수능을 다 보고 오후 5시가 넘은 시각 교문을 빠져나온 것처럼) 어쩔 수 없이 우리는 근처 바르에서 감자칩과 맥주 한 잔으로 허기를 달랬고 더 늦기 전에 다시 일어났다. 저녁은 우리 숙소가 있는 마을에서 먹기로 하며 걸어가는데 생각보다 해가 빨리 지는 게 아닌가? 하늘색이 무섭게 진해져 가다 결국 깜깜해지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그 깜깜함 속에서 비까지 내리기 시작했다. 순간 우비를 입을까 말까 고민을 했는데 우비를 입을 정도로 내리는 비는 아니었다. 그래서 그냥 비를 맞으며 최대한 빨리 숙소에 도착하고자 했다. 제각각 걷는 속도가 다르다 보니 자연스레 선발대와 후발대로 나뉘게 되었고 걸음이 빠른 편에 속하는 N언니는 선발대로 나머지는 후발대로 나눠졌으며 N언니는 체크인을 위해 먼저 가있겠다고 했다.


이때 모든 일이 시작이 되었다.


조금씩 내리는 비는 이내 맞고 갈 수 없는 수준으로 내리기 시작해서 나는 부득이하게 K언니의 모자를 빌려 쓸 수밖에 없었다. 비는 계속 왔고, 하늘을 깜깜했으며 날씨는 매우 추워지기 시작했다. 가로등도 보이지 않는 길이어서 난 앞에 가는 언니들만 바라본 채 걸어가고 있었다. 너무 깜깜해 순례길 이정표도 안 보이는 수준이었다.

다행인 건 핸드폰 배터리가 있어 플래시를 켜서 걸을 수가 있었는데 그렇게 앞에는 언니들, 오른손엔 핸드폰 플래시를 켜둔 채 한 좁디좁은 길을 막 걷고 있는 참이었다.


그때였다. 순식간에 내가 저항 없이 넘어진 것은.


갑자기 나는 아래로 쭉 미끄러졌다. 정말 한순간이었다. 잡고 있던 핸드폰은 앞으로 떨어졌고 내 심장도 같이 떨어졌다. 다행히 밑에 뭐가 걸려서 완전히 아래로 미끄러지진 않았지만, 순간 너무 무서웠었고 서러움이 밀려왔다.

나는 앞서가는 언니들을 불렀고 뒤를 돌아본 언니들은 내가 넘어져있는 것을 보고 너무 놀라 한달음에 달려와서 나를 꺼내 일으켜 세워주었다.

언니들이 걱정할까 봐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했는데 그들이 해준 위로와 걱정 한 마디에 바로 눈물이 나와버린 나였다. (그때부터 숙소에 도착할 때까지 훌쩍이며 갔다)


밤엔 너무 무서운


예약한 숙소는 마을 끝쪽에 있어 한참을 걸어가야 했다. 솔직히 너무 힘들었다.


마침내 알베르게에 다다랐을 때, 문 앞에 우산을 쓰고 우리를 기다리는 호스트를 보고 난 또 눈물이 나왔다.

이 눈물은 호스트에 대한 감동과 살았다는 안도감의 눈물이었다.

호스트는 늦은 시각에 도착할 우리가 걱정되어 마중을 나와있는 것 같았고, 계속 울고 있는 나에게 "Now, Be happy~"라며 따듯한 말로 내 마음을 달래주었다. 호스트에 말이 귀에 들어오긴 했으나,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먼저 도착한 N언니가 체크인을 다 해놓은 덕분에 우리는 바로 숙소로 들어갈 수 있었는데, 그때 N언니의 말 한마디가 나를 또 빵-하고 울게 만들었다.


"수연이 눈이 왜 빨개"


왜 이 한 마디가 눈물을 나게 만드는지... 참.


살아 돌아온 그날, 우리는 다 같이 용거실에 모여서 컵라면으로 늦은 저녁을 해결했다. 자연 앞에 인간은 너무나 나약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된 날이었는데, 건강한 지금은 "아, 그때 넘어진 것을 사진 찍어 놓을 걸-"하는 간사하고 교활한 마음도 들었다.(나란 인간..)


앞으로는 절대 무리하지 않고 조심히 다녀야겠다는 반성을 하며 많은 깨달음을 얻은 순례 25일 차의 차디찬 날이었다.


짐을 덜어주는 고마운 호스트와 울고 있던 나..^^




이전 07화 순례 24일 차: 이제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