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푸른솔 Jul 12. 2022

단풍과 솔잎

산골 일기 일곱 번째

시골 살이를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초목류에 대해 배우고 알게 된다. 

보이는 풍경이 모두 꽃이며 풀이며 나무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관심이 기울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작은 풀꽃 하나만 피어도 마음에 미소가 피어나고 설레 진다. 

시골 살이의 작은 묘미가 어제와 달리 핀 꽃 한 송이 같이 조금씩 변화하는 소박한 자연 속에 있다. 

그러니 시골 살이가 한두 해 지나면서 식물이나 원예에 관한 책을 손에 드는 일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어제는 단풍에 얽힌 글을 읽으며 단순한 잎새 이야기가 아닌 삶에 대한 성찰까지 얻는 귀한 시간을 가졌다. 

식물의 세계를 들여다보며 우리가 만물의 영장이라는 계급장을 떼고 생각해 보면 

자연 속에서 배울 것들이 지천임을 깨닫게 된다. 

돌멩이 하나 풀 한 포기에도 전 우주적인 삶의 교훈들이 가득 담겨 있는 것이다. 

아직 가을은 아니지만 나는 곱디고운 단풍을 생각해 본다.     


여름 내내 무성한 푸른 잎은 나무의 자랑이며 건강함의 상징이다. 

쩌렁한 햇살 에너지와 따스한 날씨, 그리고 풍부한 비를 머금고 

광합성을 통해 얻은 양분을 부지런히 나무에 공급해 준다. 

덕분에 여름 나무는 푸르고 싱싱하다. 

그런데 영원할 것 같았던 풍요로운 여름이 지나가며 햇살도 줄어들고 날씨마저 차가워지면 

나뭇잎이 만들어내는 양분이 턱없이 적어지기 시작한다. 

이로 인해 오히려 자신이 생산해 내는 양분보다 나무로부터 공급받아야 할 양분이 더 많아져서 

역전현상이 일어나게 된다 

소위 나무 입장에서 보면 생산성이 뚝 떨어진 부실 공장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런 역전의 순간이 오면 나무는 한 치의 미련도 없이 냉정하게 나뭇잎을 버려 버린다. 

나뭇잎과 줄기 사이에 ‘떨켜(이층(離層))’라는 세포막을 형성하여 

나뭇잎과 줄기 사이의 양분 통로를 차단하는 것이다. 

즉 나뭇잎이 제공하는 영양분을 받지 않는 동시에 나뭇잎으로 가는 영양분도 막아버리는 것이다. 

나무는 여름 내내 엄청난 양분을 제공하던 나뭇잎에 대한 기억을 모두 잊은 듯, 

어찌 생각하면 배은망덕한 결단을 서슴지 않는다.        


이제 나뭇잎은 아무리 많은 영양분을 만들어도 줄 곳이 없기 때문에 자신의 몸속에 축적해 나간다. 

그 축적된 양분이 추워지는 대기 속에서 안토시아닌이라는 붉은 색소로 변형된 것이 바로 단풍이다. 

단풍은 자신에게 남은 양분이 모두 소진될 때까지 자신을 버린 나뭇가지를 붙들고 매달렸다가 

마침내 낙엽으로 스러지는 것이다. 

단풍이 붉은 것은 어쩌면 나무로부터 버림받은 잎새의 마지막 작별의 빛깔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그동안 해 준 게 얼만데!’라고 화를 낼 법도 한데 

나뭇잎은 그저 자신을 붉게 물들이며 마치 화광 반조처럼 자신의 마지막을 곱게 물들인다. 


가만 생각해 보면 붉은 단풍이 얼마나 숭고한 빛깔인지 깨닫게 된다.       

 ‘내가 베푼 게 얼만데!’ 하며 베푼 일만 셈하기 바쁜 옹졸함으로 살아온 세월이 얼마던가! 

받은 것은 기억하지 못하고 내어준 것만 곱셈하는 나의 좁은 속내는 

한낱 미물 같은 잎새 한 장만도 못한 것 같다.        


단풍이 붉거나 노란색을 띠며 우리의 눈을 즐겁게 하는 데는 아무런 이유가 없다고 한다. 

노란 꽃은 노란색을 좋아하는 등에를 불러들이기 위함이고 보라색 꽃은 벌을 유혹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꽃들은 수분을 위해 저마다의 전략을 가지고 자신을 형형색색으로 치장할 뿐 그 마음에 사람은 안중에 없다. 사람들이 괜한 짝사랑으로 꽃들의 색깔에 연정을 품을 뿐. 

그런데 단풍이 형형색색 물들어 꽃들의 빛깔을 대체하는 데는 아무런 이유가 없단다. 

단풍이 아무리 고운 색깔을 물들인다고 해서 벌이나 새가 찾아오지 않는다. 

색이 아무리 화려해도 나무의 수분이나 번식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단풍은 고운 빛깔로 붉게 물든다. 왜일까? 봄꽃이 잎새보다 먼저 피어 우리를 위로해 주는 것처럼

단풍도 겨울의 목전에서 우리에게 마지막 선물을 안겨 주려는 신의 선물은 아닐까? 

인간의 관점에서 그냥 이기적인 생각을 해본다. 

자비로운 신은 아마도 삶에 찌들어 고단한 인간들을 위로하기 위해 

부단히 도 세심하신 배려를 베푸시는 것 같다. 


그런 단풍의 관점에서 보면 소나무는 참 놀라운 나무다. 

단풍이 소나무의 속사정을 알고 나면 자신의 본줄기에 대한 배신감으로 치를 떨지도 모르겠다. 

활엽수들이 떨켜를 만들어 스스로를 차단하는 무자비함을 보일 때 

소나무는 잎새를 바늘처럼 작게 하여 비록 부족하고 모자라고 넉넉하지 않지만 

함께 살아가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잎새가 벌어오는 양분도 작지만 잎새가 소모하는 에너지도 최소화하여 조금 먹고 조금 나누며 

공생의 푸름으로 추운 겨울을 난다. 

진화의 관점에서는 활엽수들이 더 앞서 나가는 것 같지만 공생의 덕목으로 따지면 침엽수들이 훨씬 고귀하다. 결국은 모든 잎새를 다 떨구고 을씨년스러운 앙상한 가지만 남는 헐벗음을 감당해야 하는 활엽수들과 달리 

침엽수들은 춥고 어두운 날들은 푸른빛 그대로 머금고 누구 하나 버리지 않고 함께 이겨내는 것이다. 

서로가 조금씩 틈을 내어 주고 자기 욕심을 버리고 함께 가는 것이다. 

시골 살이를 하면서 상록수에 대한 고마움은 결코 작지 않다. 

모든 것이 잿빛으로 젖는 대지 위에 푸르름이 주는 위안이 크다. 

겨우내 푸른 아열대성 활엽수들이 있긴 하지만 독야청청한 웅장한 소나무의 푸르름에 어찌 비하랴!    

   

자연 속에서는 잎새 한 장도 스승이다. 

버려진 자신을 절망하지 않고 고운 빛깔을 피워내는 단풍이나 

부족한 대로 모자라면 모자란 대로 함께 보듬고 가는 솔잎의 넉넉함이 마음을 훈훈하게 지펴온다. 

그러고 보니 작은 오해들로 소원해졌던 친구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나를 그대들에게 맞추지 못한 옹졸함을 이해하게나. 

받은 기억보다 주었던 기억들만 셈했던 나의 어리석은 기억들을 용서하게나. 

한 시절이 가고 나면 또다시 새잎이 돋듯 그렇게 잊혀 두어도 그만인 기억들을 떨쳐내고 

우리 다시 푸름에 흠뻑 젖기를. 

이전 02화 봄꽃은 일제히 피지 않는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