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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솔 Aug 30. 2022

긍정의 시각과 부정의 본능

산골 일기 스물여덟 번째

   

”와 너무 예뻐요! 확 달라 보여요! “     

정원을 가다듬고 경계석 몇 개 옮겨 놓았을 뿐인데 찾아온 이웃들이 탄성을 지른다. 언제나 그랬다. 

집을 지을 때도, 함께 우정을 나눌 때도 텐션 좋은 이웃들은 늘 탄성과 환호를 보내주었다. 

모두의 어깨가 들썩일 만큼.     


가끔은 그 긍정의 환호 때문에 진짜 내가 무얼 무진장 잘한 것처럼 착각하기도 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나는 그 긍정의 격려가 정말 기분 좋다. 이번 화단 꾸미기도 그랬다. 나는 본능적으로 직선으로 오와 열을 맞춰 

경계석을 놓았는데 칭찬과 격려 뒤에 이웃들은

 ”이왕이면 부드럽게 ’S’ 자 형으로 경계석을 놓으면 훨씬 예쁠 것 같아요. “라는 조언을 해 주었다. 

그들이 보기에 마당을 직선으로 가로지른 정원이 답답해 보였던 것이다. 그래도 우선은 달라진 정원에 대해 칭찬을 보내고 이어서 자신들의 생각을 전해주니 경계석을 다시 허물고 쌓는 일이 그리 고되다 싶지 않았다. 오히려 감사하는 마음이 들었다. 이웃들의 조언이 아니었으면 그저 본능대로 반듯하게만 쌓으려 애썼을 터였으니 말이다. 자연스럽게 흐트러진 것보다 반듯하고 질서 정연한 것이 더 좋게 보이는 직선 중심의 도시 본능이 잘 버려지지가 않는다. 하지만 이웃들 덕에 부드러운 곡선의 경계를 가진 꽃밭이 생기게 되었다.  

   

나는 귀촌하고 나서 매일 긍정의 시각을 배우려 애쓴다. 그래야 내일을 기약할 수 있는 에너지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안돼, 안될 거야 라는 생각이 먼저 들면 몸이 움직여지지 않고 결국 모든 일은 어제와 같은 모습으로 그대로 있을 터이다. 그러니 해보자 하는 긍정은 어제와 다른 오늘을 만드는 원동력이 된다. 사실 짧은 인생길에서 좋은 것만 눈에 담아도 아까운 세월인데 굳이 부정을 먼저 보며 마음 상할 이유가 어디 있을까? 부정적 생각은 결국 감정마저 부정적으로 만들어 버리기 십상이다. 하지만 우리는 마치 부정적 속성이 본능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부정에 먼저 친숙한 존재들이다. 항상 손익과 효율을 따지는 본능적 방어기제로 작동하는 것을 느낀다. 그 방어기제로 인하여 내 이익이나 내 편에 반하는 것들의 잘못과 문제를 먼저 찾아내는 일이 최우선이 되곤 한다.     


”진입로가 너무 좁아! “

”지지목이 한쪽으로 치우쳤는데... “

”여기 흠집이 하나 있는데... “             


진입로가 있어서 감사하기보다 진입로가 좁다는 사실이 먼저 마음을 사로잡는다. 지지목을 댈 수 있어서 좋은 것보다 조금 균형이 안 맞는 부분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전체가 말끔히 정리된 것은 생각나지 않고 거기 조그맣게 자리 잡은 흠집 하나가 용납되지 않는다. 부정적 본능은 항상 그렇게 존재에 대한 감사를 잃게 만든다. 

좋은 것보다 흠집이나 결함이 먼저 눈에 띄니 어찌 감사할 수 있겠는가!     


귀촌하고 집을 짓고 나니 정형화된 아파트 생활과는 다르게 소소한 문제들이 일어난다. 도시에서는 그 일들을 남에게 맡기면 그만인데 여기서는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일이 훨씬 많다. 그런데 그런 소소한 문제들을 부정적인 생각들로 천착하다 보면 그만 귀촌이 주는 시골생활의 즐거움이 상쇄되고 만다. 결국은 죽고 못 사는 

문제도 아닌 작은 흠집들 때문에 결국 누려야 할 커다란 행복마저 잃어버리는 비극이 일어나곤 한다. 

     

간혹 부정적 시각으로 자신의 입장만 생각하는 사람들을 보면 오래전 쓰라린 기억 하나가 떠오른다. 

미국 이민자로 살면서 페인트 공으로 막노동을 하던 때의 일이다. 일을 시작하고 첫 번째 맡은 집이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기로 소문난 지독한 유태인 집이었다. 내 딴에 최선을 다해 페인트를 칠하고 나서 다음 날 

가보면 칠해진 벽마다 결함을 지적하는 수십 장의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스티커가 붙어 있는 자리는 페인트 롤러가 지나간 자리에 생긴 미세한 기포가 마르면서 터진 자국들이었다. 그 자국들은 육안으로는 거의 식별

되지 않고, 모든 불을 끄고 깜깜한 상태에서 전등을 벽면에 비스듬히 비추면 겨우 보이는 직경 0.2미리 미터도 안 되는 작은 기포 자국들이었다. 하자이거나 불량이 아니었지만 나는 그 벽을 다시 칠해야 했고 내 판단

으로는 완벽하다 싶었지만 다음날 가보면 또다시 스티커가 잔뜩 붙어 있곤 하였다. 그러기를 수차례 반복했던 것 같다. 그 유태인 녀석이 저녁마다 집안의 불을 다 끄고 손전등을 비스듬히 비춰 식별조차 어려운 기포 자국을 찾아내는 모습을 생각하면 지금도 소름이 돋았다. 그의 집요한 덫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을 것이란 절망감이 들었다. 나는 결국 그의 집요한 흠집 찾기에 항복하고 ‘돈 안 받을 테니 그만합시다’라는 통보와 함께 그 일을 포기하고 말았다. 아마도 그놈은 내 입에서 그 말 떨어지기만 기다리며 쾌재를 불렀으리라. 

나쁜 자식. 그래서 얼마나 부자가 되겠다고... 

그때의 일은 지금 생각해도 몸서리나는 기억이다. 돌이켜보면 아마도 언어가 잘 통하지 않은 동양인을 골탕 먹여 공짜로 일을 마무리하려던 그의 속셈이 아니었나 싶다. 그 일을 통해 나는 ‘언제, 어디서나 결함이나 

결점보다는 긍정을 먼저 바라보자’는 결심을 굳게 했었다. 애써 부정의 습관을 지우려 애쓴다.  

    

”여보 이 옷 괜찮아? “ ”이 머리 스타일 어때? “

아내의 물음에 나는 늘 습관적인 품질관리사가 되어 현미경을 들이대기 일쑤였다.     

”조금 튀는 것 아냐? “

”색깔이 서로 안 맞는 것 같은데 “

정직한(?) 나의 본능에 되돌아온 건 결국 영문 모를 아내의 토라짐뿐이었다. 그럴 때마다 여자의 마음은 지뢰밭이라니까! 하며 속으로 혀를 끌끌 차곤 했었다. 

”와우! 오늘 정말 예쁜데! “

”당신은 뭘 입어도 어쩜 그리 잘 어울려? “


그런 말들이 뭐 그리 어렵다고 못하며 살았을까! 긍정과 감사의 습관을 갖는 것. 행복은 그곳으로부터 시작됨을 깨닫는다. 어두운 구름 밑이 아닌 햇살이 빛나는 구름 위를 먼저 바라보는 것. 작은 지적보다 긍정의 칭찬을 보내주는 호의 가득한 마음. 생의 걸음을 아름답게 하는 것은 긍정의 습관으로부터 시작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고 보니 모든 문제는 항상 내 시각으로부터였다. 세상의 변화를 원하기 전에 먼저 내 시각을 바꿔야 세상도 바뀔 수 있다.        


아무리 봐도 

다시 또 봐도 삐딱했다.

그가 아닌 내 눈이!     


그대의 문제가 아니라 아마도 내 눈이 삐딱한 걸게야! 언제나 그렇듯이. 

남의 티끌보다 네 눈의 들보를 먼저 보라는 성경의 가르침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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