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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무 Mar 29. 2024

스승님

뵙고 싶은

 초등학교부터 대학원에 이르기까지 많은 스승님들께 배웠다. 아직  더 배워야 할 것이 남아있지만, 스승님들이 계시지 않았다면 우리의 오늘의 모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였을 것이라는 데는 모두 공감하지 않을까 한다.


 많은 훌륭하신 스승님들이 떠오르지만 의사의 길을 감에 있어 내게 가장 인상 깊은 분을 꼽으라고 한다면 이희발교수님이시다.  글에서 실명을 언급하는 것은 처음인데 좋은 일이니 그리하겠다.


 이교수님은 내가 의과대학에서 수학했던 80년대 당시, 미국에서 신장내과 전문의를 취득하시고 그 후 국내에서 의과대학 교수로서  진료하신 흔치 않은 경력을 지닌 분이었다. 물론 한국에서 전문의를 취득하고 가르치시던 대다수의 국내파 교수님들도 훌륭하셨지만 이교수님은 좀 남다르셨다.


 의과대학 학생시절 여름방학 기간 동안 의료봉사를 가곤 하기 때문에 집중적으로 임상실습성격으로 교수님들 옆에서 환자 진료하시는 모습을 견학한 적이 있었다. 당시 이교수님은 외래에서 초진 환자를 보시면 20-30 분 동안 환자를 보셨고 이학적 진단 과목에 교과서에서 배운 대로 진찰을 하셨다. 심지어 무릎에 심부건반사까지도 말이다. 의학적으론 DTR(deep  tendon  reflex)로 부르는데  이를 통해 신경계 질환이 생긴 해부학적 위치에 대한 정보를 얻게 된다. 환자의 손을 바닥을 향하게 하고 종이 한 장을 올려놓으시고 '가는 떨림(fine tremor)을 보려면 이렇게 하는 것이 좋다.'시며 '갑상선기능항진증이 있으면 이런 현상이 있을 수 있다'하셨다. 환자의 피부도 만져보게 하셨는데 갑상선 기능항진증이 있으면 피부가 비단같이 느껴진다고 하시면서 말이다. 또 림프절비대가 있는지  관찰해야 하므로 환자의 쇄골 상단부를 촉진하고 두 팔을 올린 후 겨드랑이 깊이 두 손을 넣고 두 팔을 내리게 하여 촉진하는 등 나에게 의사로서 배울 진찰의  실습은 거의 모든 것이 그날 이교수님의 외래진료를 통해서 이루어졌다고 고백할 수 있다.

 

 이렇게 긴 시간 환자를 보는 것이 우리나라 진료습관에 맞지 않고 당연히 하루에 볼 환자수도 제한이 있으니 초기에는 어떤 압박이 있었지만 이교수님은 철저히 자신의 진료 패턴을 유지하셨다. 의과대학에 이학적 진찰만 철저히 해도 80% 진단할 수 있다고 귀가 따갑게 들었지만 제대로 완전히 그리하시는 분을 그 이전에도 그 이후도 뵌 적이 별로 없다. 우리나라에서 말이다. 당연히 내가 볼 수 있는 한계는 대단히 제한적이니 없다고 말하지는 않겠다.


 이교수님께 배운 것을 의료봉사에서 아낌없이 발휘하였고 인턴 때도 응급실에서 환자가 오면 그대로 꼼꼼히 진료하고 다 기록지에 빼곡히 기록하였다. 어느 날 신경과 환자가 와서 배운 대로 신경과 진찰까지 더하여 진료기록지에 기록 후 당직 레지던트께 전화로 보고했더니 이내  내려오신 신경과 레지던트께서 깜짝 놀라며 이 의무기록을 누가 작성했냐고 물었다.


 의과대학 본과 3학년이 되면서 임상실습(PK: poly Klinik, polyclic)을 하게 되는데 임상 각과를 돌면서 병원에서 실재 일어나는 진료현장을 통해 의학지식을 습득하고 체험하는 과정이다. 신장내과 이교수님께 배정되어 나와 함께 한 명이 더하여 한 조가 돼서 실습을 도는데 교수님께서 각각 환자 한 분씩 배정해 주시면서 진찰하고 그 결과를 보고서로 작성하라고 하셨다. 정해진 시간에 보고서를 들고 교수님 방으로 갔는데 두 사람을 앞에 앉히시고 빨간 펜을 드시고는 보고서를 읽어 내려가며 린 부분, 수정할 부분, 영어 표현까지 첨삭해 가시며 지도해 주셨다. 나중에 들어 보니 우리뿐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이교수님께 배정된 학생들은 다 그렇게 해주셨다는 것이었다. 이후 나는 두 곳의 의과대학에서 전임강사와 조교수 생활 중에 임상실습을 나온 학생들을 맞이할 위치에  있었지만 이것만큼은 도저히 재현할 수 없었다. 30-40명의 입원환자와 매일 외래를 보면서 남은 시간 기관지 내시경 검사를 하고  또 남은 시간 논문을 쓰고 하며 학생들에게 빨간 펜 첨삭지도까지는 정말 할 수 없었다. 이교수님은 나보다 더 많은 일을 하셨지만 어떻게 인내심도 많으시게 그리하셨을까?


 내과 레지던트가 돼서 신장내과 파트에 순환근무를 할 때였다. 내과 레지던트들은 각 내과 분과를 일정기간 정해진대로 순환 근무하며 수련을 하게 된다. 신장질환 환자가 타 대학병원으로 가고 싶다고 하여 이교수님께서 전원 서신(transfer letter 혹은 medical referral letter)을 영문으로 작성하신 것을 보여주셨다. A4용지에 빽빽이 3-4장 정도 작성해서 읽어 보는 타 병원의사가 지금까지 우리 병원에서  파악한 환자에 대한 모든 정보를 쉽게 알 수 있도록 일목묘연하게 정리한 것이었다. 그런데 며칠 후 그 환자와 보호자가 다시 우리 병원으로 돌아왔다. 그 이유를 물어보았더니 이교수님께서 작성해서 보내준 서신을 해당 교수가 힐끗 보고 자세히 읽어 보지도 않고 쓰레기통에 집어넣었다는 것이었다. 그 교수님은 당시 우리나라 최고의 신장내과 의사로 명망이 높으신 분이었다. 그 모습을 본 환자와 보호자는 진료실을 나온 후 다시 이교수님께 돌아온 것이었다.


 의사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내 인생에 각인 시켜주신 참스승이신 교수님을 못 뵌 지 이십여 년이 흘렀는데, 그동안 전화드린다 드린다 하며 행여 왜 그리 무심했냐 꾸짖으실까 하여 핸드폰을 들었다 놓곤 하다가 드디어 엊그제 전화를 드렸다. 그 카랑 카랑하던 목소리는 다 어디 가고 세월에 많이 변한 목소리는 여전히 다정하셨다. "밀양이 봄이 예쁘니 시간 되면 한번 온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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