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이 봄이 예쁘니 봄이 되면 한번 내려 온나"하신 스승님의 말씀에 '예'라 말씀드리고 첫 봄을 맞이하였는데, 가족 여행을 경주로 가게 되어 자연스럽게 스승님을 찾아뵐 기회가 되었다.
아침 6시, 가족들을 재촉하며 달리던 고속도로에서 도착지점까지 한 시간 남짓 남았을 때, 언제쯤 도착하냐는 스승님의 전화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의 다 도착하니 밀양에 이씨 고택 한옥 가구들이 무리 지어 이룬 마을이 보였다. 여주 이씨의 항재 이익구 님의 후손들이 이룬 마을인데 알고 보니 실학과 학문에 뛰어난 후손들이 많았고 일제 강점기에 항일운동과도 관련된 유서 깊은 집안이셨다. 그 기상을 기억하듯 스승님 댁 쌍매당 앞에는 이삭을 꼿꼿이 세운 싱그러운 보리들이 자그마한 한밭 가득 자라고 있었다.
고아한 한옥을 들어서자 기다리셨다는 듯이 사랑채 툇마루에 앉아계시다 일어서시는 스승님을 뵈니 감회가 새로웠다. 그 꼬장꼬장하시고 기개 높으신 교수님의 모습은 간데없으시고 온화하신 할아버님 한분이 지팡이를 의지해서 걸어오시고 계셨다. 의과대학생 시절 임상실습으로 인해 병동에 회진을 돌며 라운딩 할 때 교수님께서 같이 따라가고 있던 동급생에게 질문을 하셨는데 답을 못하자 그 자리에서 불호령을 내시며 공부에 게으름을 질책하시던 그 교수님의 모습은 어디로 간 것일까? 세월의 책장이 그 장면을 빠르게 뒤로 넘겨 버린 탓일까?
ㅁ자 형태의 고택을 여기저기 보여 주시는데, 제비 한 쌍이 집안 전깃줄에 앉아 우리가 들어서는 것을 경계하듯 주변을 날렵하게 날다가 다시 내려앉곤 하였다. 우리 집인데 웬 낯선 사람들이 말도 없이 왔냐고 하듯. 안채 깊숙이 제비가 집을 짓고 들어와 살고 있었다. 작년에 거처를 정하고 새끼를 키우더니 다시 날아왔다고 하셨다. 이전 글에서 도심으로 돌아온 제비에 대해 글을 쓴 적이 있었는데, 작은 생명이 기특해 보이기도 하고 사랑스러워 보이기도 하였다.
사랑채로 안내하고 단아한 찻상을 우리 앞에 내어 주셨는데 이 지역 전통 떡과 곶감을 차와 함께 내어 주셨다. 직접 다 만드신 것이라니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가을에 감을 T자 모양으로 가지 일부를 포함하여 딴 후 껍질을 벗겨내고 주렁주렁 매달아 말리는데 7-8백 여개를 매년 말려 곶감을 만드신다고 하니, 그것도 직접 만드신다니 그 바지런하심을 누가 말릴 수 있으랴. 물론 지인들이 돕는다 해도 수백 개는 넉끈히 깎으신다니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말씀을 듣고 곶감을 한입 베어 먹어보니 여느 곶감과는 확연히 차이가 느껴졌다. 더 부드럽되 그렇다고 물컹거리는 것이 아닌 아주 입에 착 감기는 것이 일품이었다.
코로나19 감염을 뒤늦게 앓으신 이후 체력도 현저히 떨어지셨고 기억력도 다소 떨어지셨다고 하셨는데, 꾸준히 노력하셔서 이제 지팡이를 짚으시고 걷는 것은 꽤 많이 하셔서 만보 이상 걸으신다고 하신다. 더 걸으실 수도 있지만 몸에 무리가 느껴져 만보만 걸으시는데 문제는 지팡이를 어딘가 두고 오신다는 것이었다.
최근 웨어러블 로봇과 AI에 대해 말씀드리고 하지에 차는 웨어러블 로봇을 착용하면 안정감 있게 더 잘 걸을 수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면서, 웨어러블 로봇이 우리의 신체의 제한적 역량을 보조하여 그 한계를 벗어나도록 해주는 것처럼 AI는 우리의 정신역량의 제한적인 역량을 벗어나 우리의 사고의 지평을 넖혀준다고 말씀드렸다.
교수님께서는 지금도 아침 식후에는 두세 시간 서재에 앉으셔서 인터넷을 통해 의학논문들을 즐겨 읽으시는데 신장내과학을 전공하신 교수님은 지금도 관련된 최신 논문들을 읽으신다고 하니, 연구와 논문작성으로 늘 바쁘셨던 교수님의 근황에 대한 궁금증이 풀리면서 '역시 그러시지'란 생각으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우리의 일정으로 인해 자리에서 일어나 길을 떠나려는데 교수님께서는 "내년에는 며칠 자고 가거라" 하신다. 난 자신이 없어 얼른 "네"하고 답하진 못하고 웃음만 지어 보이면서 스승님과 멀어져 가는 운전대를 잡고 있었다. 스승님, 늘 존경하고 항상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