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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ero Jul 07. 2020

판사와 의사, 공감대를 느끼다

<판사유감> - 문유석

1.

<개인주의자 선언>을 읽으며 문유석 작가의 생각에 여러 모로 공감했던 터라, 판사인 작가가 자신의 전문 영역에서는 어떤 생각을 하는지 궁금해 <판사유감>을 찾아 읽었다. 역시나 쉽게 읽히면서도 깊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좋은 에세이집이다.



2.

실제로 판결했던 사건들을 바탕으로  에세이를 책으로 펴내기까지 얼마나 고민이 많았을까. 아무리 익명으로 처리한다 하더라도 개별 사건의 특수성으로 인해 실제 사건 관련 당사자들을 겉으로 드러내게 되지는 않을까 걱정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나도 글을 쓸 때 마찬가지 고민을 한다. 내가 치료했던 환자들, 항상 성공할 수도 늘 웃을 수도 없었던 그 기억들을 글로 만들어 낸다는 것은 언제나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의사는 환자의 치료와 관련한 비밀을 보장할 의무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 좋자고 쓴 글 나부랭이가 행여 환자들에게 누가 되지 않을까, 혹시 누군가의 의료 기록을 만천하에 공개하는 파렴치한 행위가 되어 버리지는 않을까 고민한다. 환자의 안타까운 사연을 내 개인 SNS에 '좋아요'를 하나 더 얻기 위한 값싼 감성팔이로 써먹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고민하고, 또 고민한다.


내 글이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고 누군가에게는 희망이 되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쓰는데, 사실 잘 모르겠다.


혹시라도 언젠가, 그럴 일이 과연 이번 생에 있을지 모르겠지만, 만약에 정말 혹여나 내 글들을 모아 책을 펴내게 된다면, 나는 마찬가지의 고민을 그때 또 하게 될 것 같다.



3.

"날고 기는 루키 투수들을 드래프트 1순위로 뽑아 온 것인데, 코치진이 첫해부터 실전 등판시켜 보고는 미숙하다고, 도대체 뭘 배워 온 거냐고 타박만 해서야 되겠습니까."

- <판사유감> 본문 중 -


날고 기는 학생들만 뽑아서 모아 놓은 의과대학 내에서도 그 실력은 차이가 나기 마련이다. 하지만 학생이 아무리 뛰어나 봐야 학생일 뿐이다. 임상 경험 없이 책으로 공부한 지식을 병원 실습으로 정리해 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물며, 수십 년을 한 분야에만 종사하고 있는 의과대학 교수의 눈에 비친 학생들이란 아무것도 모르는 햇병아리로 보일 것이 뻔하다.


요즈음, 아니 사실은 지난 수년간 늘 그랬지만, 금요일 아침마다 힘들다. 실습 학생들의 발표를 들어주어야 하고, 그 발표를 시니컬하기 짝이 없는 말투로 난도질하는 K교수님의 코멘트를 견디어 내야 한다. 현대 의학이 얼마나 다양한 분야로 나뉘어 있고 각 분야마다 얼마나 방대한 지식이 쌓여 있는데, 학생들이 그 지식들을 모두 습득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의과대학 교육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General physician'의 양성일 진대, 각 교수님마다 자신의 전공 분야에 대한 좁고 깊은 지식을 학생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K교수님께 <판사유감>의 한 구절을 꼭 보여 드리고 싶다.


"결론적으로 부장님들께 드리는 제 처방은 '눈높이를 낮추시라!'입니다. 가끔 돌연변이로 판결을 성숙하게 잘 쓰는 분도 있겠지만 그쪽이 비정상이고, 아직 미숙한 쪽이 정상입니다. 물론 미숙하지만 성장 가능성은 무궁무진한 분들이고요."

- <판사유감> 본문 중 -


물론, 이 글은 K교수님께서 절대 읽으실 리가 없다는 전제하에 쓴 글이고, 나는 또다시 찾아올 금요일 아침의 힘듦을 그저 묵묵히 견딜 예정이다. 실습 학생들이 방학을 맞을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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