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와 의사, 공감대를 느끼다
<판사유감> - 문유석
1.
<개인주의자 선언>을 읽으며 문유석 작가의 생각에 여러 모로 공감했던 터라, 판사인 작가가 자신의 전문 영역에서는 어떤 생각을 하는지 궁금해 <판사유감>을 찾아 읽었다. 역시나 쉽게 읽히면서도 깊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좋은 에세이집이다.
2.
실제로 판결했던 사건들을 바탕으로 쓴 에세이를 책으로 펴내기까지 얼마나 고민이 많았을까. 아무리 익명으로 처리한다 하더라도 개별 사건의 특수성으로 인해 실제 사건 관련 당사자들을 겉으로 드러내게 되지는 않을까 걱정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나도 글을 쓸 때 마찬가지 고민을 한다. 내가 치료했던 환자들, 항상 성공할 수도 늘 웃을 수도 없었던 그 기억들을 글로 만들어 낸다는 것은 언제나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의사는 환자의 치료와 관련한 비밀을 보장할 의무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 좋자고 쓴 글 나부랭이가 행여 환자들에게 누가 되지 않을까, 혹시 누군가의 의료 기록을 만천하에 공개하는 파렴치한 행위가 되어 버리지는 않을까 고민한다. 환자의 안타까운 사연을 내 개인 SNS에 '좋아요'를 하나 더 얻기 위한 값싼 감성팔이로 써먹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고민하고, 또 고민한다.
내 글이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고 누군가에게는 희망이 되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쓰는데, 사실 잘 모르겠다.
혹시라도 언젠가, 그럴 일이 과연 이번 생에 있을지 모르겠지만, 만약에 정말 혹여나 내 글들을 모아 책을 펴내게 된다면, 나는 마찬가지의 고민을 그때 또 하게 될 것 같다.
3.
"날고 기는 루키 투수들을 드래프트 1순위로 뽑아 온 것인데, 코치진이 첫해부터 실전 등판시켜 보고는 미숙하다고, 도대체 뭘 배워 온 거냐고 타박만 해서야 되겠습니까."
- <판사유감> 본문 중 -
날고 기는 학생들만 뽑아서 모아 놓은 의과대학 내에서도 그 실력은 차이가 나기 마련이다. 하지만 학생이 아무리 뛰어나 봐야 학생일 뿐이다. 임상 경험 없이 책으로 공부한 지식을 병원 실습으로 정리해 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물며, 수십 년을 한 분야에만 종사하고 있는 의과대학 교수의 눈에 비친 학생들이란 아무것도 모르는 햇병아리로 보일 것이 뻔하다.
요즈음, 아니 사실은 지난 수년간 늘 그랬지만, 금요일 아침마다 힘들다. 실습 학생들의 발표를 들어주어야 하고, 그 발표를 시니컬하기 짝이 없는 말투로 난도질하는 K교수님의 코멘트를 견디어 내야 한다. 현대 의학이 얼마나 다양한 분야로 나뉘어 있고 각 분야마다 얼마나 방대한 지식이 쌓여 있는데, 학생들이 그 지식들을 모두 습득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의과대학 교육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General physician'의 양성일 진대, 각 교수님마다 자신의 전공 분야에 대한 좁고 깊은 지식을 학생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K교수님께 <판사유감>의 한 구절을 꼭 보여 드리고 싶다.
"결론적으로 부장님들께 드리는 제 처방은 '눈높이를 낮추시라!'입니다. 가끔 돌연변이로 판결을 성숙하게 잘 쓰는 분도 있겠지만 그쪽이 비정상이고, 아직 미숙한 쪽이 정상입니다. 물론 미숙하지만 성장 가능성은 무궁무진한 분들이고요."
- <판사유감> 본문 중 -
물론, 이 글은 K교수님께서 절대 읽으실 리가 없다는 전제하에 쓴 글이고, 나는 또다시 찾아올 금요일 아침의 힘듦을 그저 묵묵히 견딜 예정이다. 실습 학생들이 방학을 맞을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