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
아스팔트가 깔리지 않은 시골길을 낡은 버스 한 대가 털털거리며 달리고 있었다. 버스가 지나가는 자리마다 흙먼지가 자욱하게 일었다. 버스 기사 준수는 라디오에서 흘러 나오는 트로트 가요에 맞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울퉁불퉁한 길 위에서 버스가 쿵 소리를 내며 한 번 크게 요동쳤다.
“어이쿠, 죄송혀유. 여기 왤케 땅이 패였댜? 공뭔 놈들 뭐하고 자빠진 겨 장마 끝난 지가 원젠디?”
“으흠.”
중간에 앉아 있던 석구가 마른 기침 소리를 내며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아이구, 석구 형님 계셨슈? 원제 타셨대유?”
“원제 타긴 뭘 원제 타? 버스에 몇 명이나 있간디?”
석구 말대로 버스에는 다섯 명 밖에 없었다. 면사무소 주사인 석구와 시장에 산나물을 내다팔러 가는 미연이네 할머니, 그리고 미연이네 할머니와 생일이 같아 어린 시절부터 둘도 없는 단짝 친구로 지내 온 사과 팔러 가는 홍식이네 할머니, 그리고 작년에 진호와 사별한 진호댁이 전부였다.
“말이야 맞는 말이지 뭐. 나랏밥 자시는 분들이 길 좀 닦아 주면 좀 좋아? 뻐스 한 번씩 꿍꽝 거리믄 우리는 관절에 기스나. 집에 가믄 뭐 아주 삭신이 후달려.”
“아, 그거야 뻐스 때문이겄슈? 할매들 시장판에서 하루죙일 쪼그려 있어서 글치?”
“하이구야, 누가 너보고 길 닦으랬냐? 왜 시비는 시비여? 그리구 바쁘신 공뭔 양반이 어짜서 즘심 때가 다 돼서 출근을 하신댜?”
“마누라가 고뿔에 걸려서 죽겄다는디 워째유. 가정이 있어야 나라도 있는 거 아니겄슈?”
“늦장가 들더니 팔출불 나부렀네. 깔깔깔.”
“아, 그리구 까놓고 말해서 뭐 공뭔들이 일하기 싫어서 안 해유? 장마 땜시 무너지고 깨진 디가 한두 군데가 아녀유. 뭐 막말로 돈이 있어야 뭘 해도 션하게 하쥬. 쥐꼬리 만한 예산 가지고 일 할라믄 우선 순위가 있어야 하는규. 공뭔들이 뭐 죄 진 것도 아니구 욕 좀 그만들 해유.”
“아따 썩을 놈 한매디도 안 지고 꼬박꼬박 말대꾸 하는 뽄새가 아주 인물 났구먼 인물 났어.”
“인자 고만혀.”
입담이 좋은 미연이네 할머니와 석구의 티격태격에 말수 없고 점잖기로 소문난 홍식이네 할머니가 중재하고 나섰다.
“날도 오질나게 더운디 창문도 못 열고 헝게 걍 농담 따묵기라도 해야쟤. 안 그냐, 돌 석자 석구야?”
“그건 그려유.”
먼지가 뿌옇게 일어나는 창 밖을 내다보며 석구가 맞장구쳤다. 그때 다시 버스가 크게 한 번 요동치더니 홍식이네 할머니 소쿠리에서 사과 하나가 떨어져 앞으로 또르르 굴러갔다.
“워매 할무이 이거 저 묵으라고 주는 규?”
“묵을라믄 돈 내고 처묵어 잡것아. 그거 과수원집에서 빼빠지게 일하고 품삯 대신 받은 거여. 니가 그거 공짜로 처묵고 용가리 턱주가리가 되겄냐 통뼈가 되겄냐?”
“어따 참말로. 사과 함 묵을라다가 할매 따발총에 귓구녕 다 헐겄슈.”
버스가 잠시 멈추자 홍식이네 할머니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진호댁이 일어나 사과를 주워 가방에서 면 수건을 꺼내 닦은 뒤 홍식이네 할머니에게 건네고 자리에 가서 앉았다.
“워디 가는 겨?”
홍식이네 할머니가 진호댁에게 상체를 돌리며 물었다. 홍식이네 할머니의 목소리에는 신혼이 얼마 지나지 않아 서방을 잃고 독수공방 신세가 된 진호댁에 대한 안쓰러움이 묻어 있었다.
“예, 볼일이 쪼매 있어서유.”
“그려.”
홍식이네 할머니는 팔을 쭉 뻗어 건네 받은 사과를 진호댁에게 다시 건넸다.
“왜유?”
“집에 가서 묵어. 올해 사과 농사가 잘 돼서 맛이 잘 들었어.”
“아녜유. 할머니 파시는 사과를 제가 어찌키 받아유?”
진호댁은 손사래를 치며 사양했다.
“아따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는 디 지는 안 주고 진호댁만 챙기시네유?”
준수가 룸 미러를 보고 웃으며 농을 쳤다.
“떡이 있었으면 줬겄지 이 놈아. 너 떡 줄라고 떡 방앗간이라도 차리까?”
“말이 그렇다는 거쥬우.”
준수의 능청에 미연이네 할머니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진호 살았을 적에 내한테 잘했다. 문짝도 고쳐 주구 돼지우리도 고쳐 주구 밭도 갈아 주구. 그기 암 것도 아니다.”
“고마워유, 할머니.”
진호댁이 인사를 꾸벅하며 면 수건으로 사과를 잘 감싼 뒤 가방에 조심스럽게 넣었다.
“아이쿠, 저게 뭐여? 사, 사람 아녀?”
버스를 급히 세우며 준수가 말했다. 준수의 말에 다섯 승객들은 저마다 자리에서 고개를 길쭉하게 빼고 버스 앞의 먼지 틈으로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리며 살폈다. 준수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길에 쓰러져 있는 물체를 향해 다가갔다.
“내려들 와 봐유! 사람 맞아유. 사람이유.”
사람들이 차례로 버스에서 내려 준수에게 다가갔다.
“숨은 붙어 있슈.”
하얀 와이셔츠에 검정색 정장, 갈색 구두의 남자가 누워 있었다. 30대 초반 정도의 말쑥한 얼굴 위로 머리칼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남자의 옷 위로 먼지가 뿌옇게 내려앉고 있었다.
“뭐혀? 빨랑 버스에 태워야지. 읍네 보건소에 데려다 줘얄 것 아녀?”
미연이네 할머니가 석구를 보며 재촉했다.
“누가유?”
“누구긴 누구여? 시방 말하는 양반이지. 공뭔이 그람 국민을 모른 척 한다구? 애라 이 썩을 놈. 준수야 얼른 얼른.”
“예. 석구 형님 좀 도와줘유.”
준수와 석구가 머리와 다리 쪽을 각각 들고 버스에 올랐다. 몸이 축 늘어진 탓에 의자에 앉히는 것보다 바닥에 눕히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준수가 생각하는 찰나에 석구가 고개를 끄덕였다. 석구와 미연이네 할머니가 양쪽에서 발을 뻗어 남자의 몸이 굴러다니지 않도록 지탱했다.
‘무슨 일이셔유?”
보건소 김 간호사가 남자를 업은 준수와 석구, 진호댁을 보며 물었다. 진호댁이 남자의 자켓을 들고 있었다.
“버스 타고 오는 디 길 가운데 쓰러져 있더라구유. 자세한 건 여기 이 분이 설명해 드릴 거니께 얼른 얼른 병실로 안내 좀 해 줘유.”
시간 여유가 있던 진호댁이 남자의 수속 절차를 맡아 주기로, 사람들은 버스에서 합의했다. 석구가 면사무소로 돌아가는 대로 면장에게 보고하여 남자의 진료비 등 향후 발생할 수 있는 비용을 책임지기로 했다.
“이리로 오셔유.”
김 간호사는 복도 끝에 있는 병실로 사람들을 이끌었다. 김 간호사가 스위치를 켜고 흰 천이 깔려 있는 두 개의 간이 침대 중 왼쪽에 눕히라고 안내했다. 창에 얇은 파란색 커튼이 쳐져 있었다. 김 간호사가 커튼을 젖히고 묶은 뒤 창문을 활짝 열었다. 덕분에 보건소 특유의 싸구려 소독약 냄새가 조금씩 가시기 시작했다.
“지는 좀 쉬었다가 또 다음 운행 준비해야 허거든유. 지 먼저 가 볼게유. 좀 부탁 드려유. 이따 봬유”
준수가 진호댁에게 꾸벅 인사하고 나서 석구에게도 고개를 숙인 뒤 먼저 자리를 떴다. 사람들은 각자 일을 보고 보건소 문을 닫는 6시에 모두 모이기로 했다.
“지도 그때 올게유. 수속만 좀 마쳐 주시구 일 보세유.”
“야. 알겠어유.”
인사를 마친 석구도 뛰다시피 병실을 빠져나갔다.
“보호자 분, 수납 창구로 와 주세요.”
김 간호사가 진호댁에게 말한 뒤 종종걸음으로 먼저 떠났다. 진호댁은 남자의 자켓을 벽에 박혀 있는 못 위에 걸어 두고 병실 밖으로 나가 문을 닫으려다 그냥 열어 두기로 했다. 아무래도 좀 더운 날이었다. 김 간호사에게 가면서 진호댁은 보호자라는 단어를 생각했다. 오랜만에 듣는 단어였다. 남편은 세상을 떠나면서 그 단어를 함께 가지고 갔다.
진호댁은 읍네상회에서 이것저것 둘러보다가 설탕과 소금, 미원을 한 봉지씩 사서 가방에 담았다. 여기저기 남편과 함께 다녔던 곳들을 정처없이 걷다가 쉬다가 하며 시간을 보내고 난 뒤였다. 남편이 떠난 곳에서 남편과의 추억과 대면하며 사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홍식이네 할머니 덕에 마음을 다잡았지만 눌러앉으면 남편이 남기고 간 쓸쓸한 시골집에서 미연이네 할머니와 홍식이네 할머니처럼 늙어갈 것이었다. 진호댁은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대고 긴 한숨을 후 하고 소리 내어 뿜었다. 그곳에서는 행복한가요? 당신의 연극은 왜 그리 짧았나요? 왜 그런 역을 맡았나요? 나의 연극에도 2막이 있을까요?
“이제 와유?”
보건소 마당에서 담배를 피고 있던 준수가 알은 체를 했다.
“좀 늦었네유. 죄송해유.”
“아뉴우. 우리도 곰방 전에 왔슈. 금방 들어갈 게유.”
진호댁이 살짝 고개를 숙여 알았다는 신호를 하고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준수가 진호댁의 뒷모습을 슬쩍 바라보고는 재빨리 시선을 거두며 하늘에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별 이상은 없어. 아까 정신 차려서 저녁 밥도 떴고. 뭔 일인지는 몰겄지만 기억을 잘 못하는 것 같더구만. 서울 사람인 거 같어 말씨가. 보건소 문 닫으야 허니께 얼른 합의들 봐.”
보건소장 강 선생이 숫자만 큰 둥그런 벽시계를 가리키며 말했다. 보건소는 입원이 안 되니 보건소에 둘 생각일랑 말고 군내 병원으로 옮기든지 당신들 집에 재우든지 양단간에 결정을 보라는 얘기였다. 자기 이름도 기억 못하고 돈도 없어 보이는 타지 사람을 알아서 하라고 버려 둘 정도로 인심 사나운 동네는 아니었기에 강 선생은 그 옵션은 아예 꺼내지 않았다. 여하튼 병원으로 옮겨 봤자 이상도 없는데 입원비만 깨질 게 뻔하다는 말이니 논의의 주제는 자연스레 누구의 집으로 남자를 데려갈 것이냐에 모아졌다.
“지는 마음은 있어도 방법이 없구만유. 방 두 칸에 엄니 계시니께유.”
석구가 먼저 조심스레 입을 떼면서 준수를 바라보았다.
“아, 왜 저를 봐유? 저 뻐스 운전사유. 세 들어 사는 단칸방에서 잠이라도 푹 자야 손님덜 안전하게 모시쥬. 지는 다른 사람 있으면 잠 못자유.”
“우리도 좀 빼 줘. 애들 사춘기라 지들 방 하루 내주고 같이 자자 하믄 난리칠 겨.”
미연이네 할머니가 홍식이네 할머니의 어깨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홍식이네 할머니가 미안해하는 표정을 지으며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러자 사람들의 시선이 남은 진호댁에게 모아졌다.
“그건 안돼.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는데.”
홍식이네 할머니가 정색하며 말했다.
“괜찮여유. 건넌방 세 나간 지 얼마 안 돼서 깨끗하고 허니 거기 묵으면 돼유. 날 밝는 대로 두 분 할머니께서 오세유. 정신 차리게 한 후 보내도 보내야 허지 않겄어유?”
“알았네. 공뭔들은 뭐혀? 이럴 때 마을회관 같은 거 있으면 좀 좋아? 다른 마을에는 다 있더구먼.”
미연이네 할머니가 미안한 마음에 화살을 석구에게 돌렸다.
“왜 또 저한티 그러세유. 지가 뭐 돈 싸놓구 안 해유?”
“자자, 결론도 일찍 났응게 인자 이동혀유. 막차 7시니께 식사 안 허신 분들 허시고 7시까정 뻐스에 다 타셔야 해유. 막차 타임에는 승객덜 많은 거 아시쥬? 미리미리 타고 계시는 기 좋아유.”
“그려. 이동들 허시쥬.”
준수의 말을 거들며 석구가 애기했다. 사람들은 보건소장과 김 간호사에게 ‘수고혔다’는 인사말을 남기고 버스가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읍내에 있는 중고등학교에 다니는 학생들과 직장에 다니는 사람들이 이용하는 첫차와 막차는 늘 만원이었다. 방학이 끝났지만 저녁 날씨는 여전히 후텁지근했다. 사람들의 땀 냄새와 발 냄새가 뒤범벅된 야리꾸리한 악취가 버스 안에 진동했다. 그래서 여름의 만원 버스에는 창문을 열자는 사람들과 먼지를 뒤집어쓸 수는 없다는 사람들로 나뉘어 가위바위보를 하는 전통이 있었다. 이른바 개창파와 폐창파의 대결이었다. 노후한 버스여서 천장에 들어올릴 문은 없었다. 이 전통이 생긴 후 서로 목청이 찢어져라 삿대질하며 다투던 일은 사라졌다. 맨 뒷자리에 나란히 앉은 청학리 마을 사람들은 간만에 목격하는 승부의 결과가 어떻게 될지 호기심 어린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의문의 남자 만이 왼쪽 창문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있었다. 석구가 자신의 어깨로 남자의 어깨를 툭 치며 재미있지 않냐고 말을 걸려다가 괜히 멋쩍은 기분이 되었지만 이내 밝은 표정으로 앞을 주목했다.
달리기 시작한 버스에서 손잡이를 잡고 버텨 선 오늘의 검투사 두 명은 미연이네 할머니가 자기 손녀 친구인 것 같다고 한 당차게 생긴 여고생과 교복 단추를 불량하게 풀어 버린, 제법 콧수염이 시커멓게 자란 남학생이었다. 오늘의 승부는 단판으로 정해졌다. 문을 열거나 닫거나 둘 중 하나를 빨리 실행하자는 것이었다. 여학생들에게 하얀색 교복과 머리카락에 흙먼지를 뒤집어쓰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창문이 절반은 닫히고 절반은 열린 버스 안으로 바람이 자주 먼지를 끌고 들어왔다.
“하나 둘 셋에 내기다!”
“그려, 반칙하면 뒈지는 거다!”
등 뒤에 손을 감추고 선 두 학생은 서로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다. 호기롭게 “하나 둘 셋”을 외치고 남학생이 낸 것은 보. 하지만 그 앞에 여학생의 손가락이 가위 모양을 하며 까딱이고 있었다.
“와아아아!”
여학생들의 고함으로 버스가 떠나갈 듯이 요동쳤다.
“에이 씨발.”
승부에 패배한 남학생이 큰 소리로 욕설을 내뱉었다.
“아따 어른들도 많은디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자슥이 욕 한 번 걸쭉하네잉. 고추 달고 나온 사내 자슥이 졌으면 깨끗하게 승복하면 그만이지 어디다 욕지거리여 욕은? 니가 무조건 이기라는 뱁이 있는 겨? 워디에 있냐? 잘난 대한민국 벱에 있냐, 니 똥구녘 속에 있냐?”
미연이네 할머니가 속사포처럼 쏘아붙인 말에 남학생이 입을 다물고 뒤로 돌아 창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노면을 따라 버스는 꿀렁꿀렁 파도쳤고 그때마다 서 있는 사람들의 몸도 이리저리 빨랫줄에 걸린 시레기처럼 축 늘어져 흔들렸다.
청학리는 오래 전에 푸른색 학이 날아왔다는 전설을 따라 붙여진 명칭이었다. 청학을 보았다는 사람이 있을 리 만무했지만 원체 산세가 수려하고 물이 좋은 동네였기에 마을 사람들은 언젠가 가을 하늘을 닮은 멋들어진 학 한 쌍이 오고야 말 거라는 되도 않는 기대를 품고 살았다. 하지만 읍내에 공단이 조성되고 하늘 높이 치솟은 굴뚝 마다 시커먼 매연을 내뿜기 시작한 이후로 농으로라도 학 얘기를 꺼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버스가 읍내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청학리 입구 공터에 멈춘 것은 출발 후 딱 한 시간이 지난 8시 정각을 막 넘어서였다.
첫차 시간은 6시였다. 배차 간격이 3시간이라 읍내에 직장과 학교를 두고 있는 청학리 주민이라면 무조건 첫차를 타아 했다. 청학리에는 직장인이 없었다. 준수의 첫 운전은 늘 미연이와 홍식이를 태우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과수원과 너른 밭을 소유한 김씨네 농사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했고, 소수만이 자기 텃밭을 일구거나 임자가 정해지지 않은 산에서 나물이나 약초를 캐 내다팔며 살았다. 군대에서 운전병으로 복무한 준수가 버스 회사에 취직하지 않았다면 청학리가 종점이 되지 않을 수도 있었을 터였다. 동네 할미들 생각해서라도 이사 갈 생각은 꿈도 꾸지 말라는 모친의 유언이 있었던 터라 준수는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생각으로 눌러앉아 있는 중이었다. 읍내로 나간다고 눈먼 처자가 마음을 줄 일도 없을 것이어서 준수는 그냥저냥 사는 대로 살기로 했다. 볼 때마다 타박하기 일쑤인 미연이네 할머니도 실은 그런 준수에게 늘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었다.
“고생들 허셨슈. 편히들 쉬셔유.”
“그려, 니가 고생혔다. 들어가그라”
“예예, 진호댁도 들어가셔유.”
“예, 드가세유.”
버스를 뒤로 하고 사람들은 저마다 인사를 나눴다. 홍식이네 할머니가 진호댁의 손을 붙잡고 말했다.
“다행히 사람이 나빠 보이진 않는다. 니한테 미안하구마.”
“그런 말씀 마세유. 지가 한다고 혔는디유. 걱정 마시구 어여 드가세유.”
홍식이네 할머니가 고개를 끄덕이며 멀찍이 기다리고 서 있는 미연이네 할머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가유.”
진호댁이 집을 향해 걸음을 떼며 말하자 남자가 다섯 걸음 정도 거리를 두면서 따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