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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nry Oct 27. 2022

123년 전, 리치먼드는 왜 제물포에서 잠들었나?

리치먼드의 묘비



그는 제물포에서 잠들었나?

만수산에 올라 밑을 내려다보면 인천가족공원이 한눈에 들어온다. 가을 햇살 받은 비석들이 줄지어 서 있다. 직사각형의 묘비에 하얀 대리석 갓을 씌운 비석들이 열병식을 벌인다. 가족들이 찾아와 놓아둔 꽃들이 군데군데 보인다. 모두 얼마나 많은 사연을 안고 왔을까. 시든 꽃잎만큼 어느 가을 오후의 햇살도 시들어 간다.   

   

이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생전에 누렸던 부귀영화의 크기와 상관없이 반 평 채 안 되는 공간에서 누웠다. 삶은 항상 기쁨으로 가득한 건 아니다. 이들의 삶도 다들 고만고만한 상처를 간직했을 것이다. 누구의 고통이 덜하고 더할 것 없고, 아픔 없는 삶은 없다. 각자의 기쁨과 슬픔을 모두 뒤로한 채 양지바른 공원에 나란히 잠잔다.     


산에서 내려와 공원 왼쪽으로 들어서면 외국인 묘지가 있다. 대부분 1800년대 말과 1900년대 초 제물포항에서 잠든 외국인들이다. 영국, 미국, 캐나다, 러시아, 이탈리아에서 온 상인, 해관원, 선교사, 해군 병사 51명이 잠들었다. 지금부터 100년 전후의 무덤이라 찾는 이 없이 고요하다. 그것도 이역만리 타국에서 잠든 사람이라 고향 마을에서 이들을 기억하는 이도 모두 죽고 없다.    

                       

무덤 중에서도 유별나게 눈에 띄는 묘비가 있다. 프랭크 리치먼드의 무덤이다. 캐나다 몬트리올 출신인 그는 사망 당시 나이가 겨우 23세였다. 그에게는 만삭인 아내 치쿠(Chiku)와 어린아이 2명의 가족이 있었다. 그녀의 고향은 일본 나가사키였다.     


“겨우 23살인데 만삭의 아내와 어린 두 아이를 두고 이렇게 일찍 죽다니?”

“그러게 말이요. 캐나다 몬트리올이면 도대체 어디요? 이역만리 먼 타국에서 어찌 눈을 감을까?”      

    

1899년 11월 22일 리치먼드가 죽고 사흘 만에 치러졌다. 장례식에 참가한 사람들이 안타까이 나눴을 것 같은 대화다. 성공회 교회 주교의 집전에 따라 인천해관 직원 모두가 참석한 가운데 치러졌다. 스물세 살의 젊은 나이에 먼 이국의 젊은이가 왜 제물포에서 잠들었는지 궁금했다.


리치먼드는 외국을 동경하고 외국에 대한 호기심이 많은 학생이었다. 그는 학교에서 청나라와 조선을 공부했다. 언젠가는 이곳으로 올 것이라 다짐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1896년 전후 11,342km나 떨어진 먼 상하이로 왔다. 상하이에 도착해 몇 달을 지내면서 중국말을 익히며 일자리를 구했다.

 

리치먼드가 중국의 상하이 해관 경비원(Watcher) 자리를 얻은 것이 1897년 4월 1일이니 얼추 계산이 맞다. 경비원으로 일한 지 8개월이 지난 1897년 11월 30일 천진 해관의 수습 검자수(Probationary Tidewaiter)로 자리를 얻는다. 그곳에서 1년 정도 일하다가 1898년부터 천진의 밴드 회사 천진공사양호(天津公司 洋號)의 밴드 마스터로 자리를 옮겼다.     


1899년 9월 제물포로 건너온 리치먼드는 대한제국의 인천해관의 관원으로 자리를 잡았다. 인천해관에서 일한 지 겨우 2개월 만에 그는 집 근처 노상에서 주검으로 발견됐다. 그의 죽음은 조선신보, 황성신문, 독립신문, 상하이의 영자지 North China Herald에 보도될 정도로 큰 사건이었다. 인천해관은 범인을 제보하는 사람에게 당시로는 거액인 100달러의 포상금을 걸었다. 끝내 범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자신의 운명이 이렇게 될 줄 았았다면     

그는 제물포에서 겨우 2개월 남짓 살았다. 그것도 인천해관원으로 취직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다. 근무 기간이 짧아 특별히 업무 관계로 원한을 살만한 일은 없었을 것이다. 만일 업무적인 원한 관계라면 121년 전 제물포 인구가 얼마 되지 않아 알 만한 사람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혹시 그가 일본인을 아내로 둔 것 때문에 사람들의 반감을 산 건 아닐까. 그녀의 아내가 특별히 조선인의 반감을 살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당시 인천해관은 대한제국 소속이었고, 조선의 주권이 엄연히 살아 있을 때다. 말단 직원의 일본인 아내가 유세 떨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의 죽음은 신문에 대대적으로 보도되고, 인천해관에서 현상금을 걸었다. 아무 소득이 없었다. 그런 그의 죽음의 이유를 지금에서야 더 알 도리가 없다. 그가 원할 살 만한 일을 하지 않았고, 살해당할 만한 이유가 없었다면 남은 가족의 삶이 애잔하다.           


그가 사망할 당시 그의 아내는 만삭이었고, 어린아이가 두 명 있었다 나이로 추정해보면 어린 두 아이는 리치먼드의 아이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리치먼드가 상하이에 도착한 해가 그가 사망하기 불과 2년 하고 몇 개월 전이기 때문이다. 중국에 도착한 후 일본이 아내를 만났고, 그녀와의 사이에 만삭의 아이를 가졌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일본인 아내는 리치먼드와 재혼한 것으로 추정된다.    

       

리치먼드와 그녀는 세 아이를 잘 키우자고 약속했다. 당시 조선의 사정을 생각할 때, 제물포는 급변하는 역사의 소용돌이로 빨려들었다. 그런 상황에서 그녀가 혼자 낯선 제물포에 머무르기는 매우 힘들었다. 어쩌면 세 아이를 데리고 그녀의 고향인 나가사키로 돌아갔을 것이다. 신산한 그들의 운명은 어떻게 됐을까?     

     

리치먼드가 자신의 운명이 이리될 줄 알았다면 몬트리올을 떠나지 않았겠지. 아니 상하이로 왔다 해도 제물포로 건너오지 않았을 것이다. 인천해관의 해관원 자리는 젊은 외국인인 그에게 무척 매력적이었다. 그러니 가족들을 데리고 낯선 제물포로 건너왔다. 앞으로 행복한 일만 있을 거라는 기대를 품고 온 땅에서 불과 두 달 만에 비명횡사했다.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살라.

23살의 젊은 나이에 먼 이국에서 죽어간 리치먼드의 묘비 앞에서 얄궂은 그의 운명을 생각한다. 아무리 삶이 죽음을 향해 가고 있다 해도 그는 너무 일찍 목적지에 도착했다. 100년도 더 지난 어느 가을, 누군가 그의 삶을 찾는다는 사실을 어찌 짐작이나 했겠는가. 한 치 앞을 모르는 것이 세상살이다.    

 

개혁주의 신학자 칼뱅(John Calvin, 1509-1564)은 “우리는 항상 죽음을 향해 가고 있다”라고 말했다. 20세기의 뛰어난 철학자인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는 “인간은 죽음을 향한 존재(Being-toward-death)”라고 정의했다. 삶을 충실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칼뱅은 종교적 관점에서, 하이데거는 철학적 입장에서 설파했다.     


“사람은 누구나 모든 사람이 다 죽는다고 하면서도 자신은 죽지 않을 것처럼 생각한다. 사람들은 죽는다는 것을 다 알고 있다. 그렇지만 마치 그것을 알지 못하는 듯 미친 듯이 산다.”라고 리처드 박스터 목사(Richard Baxter, 1615~1691)가 경고했다고 한다. 그는 사람이 평생 살 것처럼 욕망에 휘둘리면서 미친 듯이 사는 것을 지적했다.           


미친 듯이 사는 것이 꼭 나쁜 것일까? 누가 한 말인지 논란은 분분하지만,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살라”라는 말도 있다.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열심히 그리고 성실하게 살라는 뜻으로 새기면 좋은 말이다. 벅스터 목사의 충고처럼 욕망에 빠져 미친 듯이 살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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