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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nry Oct 27. 2022

깊은 산골 차요테(Chayote) 농장의 가을밤

추억의 공통분모     

문득 떠오른 옛일이 애틋한 그리움이면 추억이다. 애써 외면하고픈 일이 떠오르면 기억이다. 흘러간 시간 속에 그리움을 많이 건지면 좋은 일이다. 손에 잡힐 듯 눈앞에 아른거리는 곳, 명치끝으로부터 전해오는 그 느낌과 향기, 너무 멀리 왔기에 되돌아갈 수 없던 시절의 추억이 떠오르는 계절이다.   

             

옛 친구들을 만나면 추억의 공통분모를 맞춰본다. 뭐가 좋은지 그냥 즐겁다. 만날 때마다 그랬으니 수백 아니 수천 번이나 그랬을 것이다. 그래도 언제 그랬느냐는 듯 깔깔대며 웃는다. 추억 맞추기 놀이만큼 중독성이 강한 놀이가 어디에 있을까. 그 숱한 햇빛과 달빛은 어디로 가고 여전히 그때 그 시절일까. 신기하면서도 재밌다.               


방황과 혼란의 시간을 함께했다. 할 말은 산처럼 쌓이고, 마신 술은 강을 이뤘다. 빈약한 주머니와 갈 곳 없는 발길은 허무했다. 내일을 기약하지 못한 청춘은 공허했다. 외로운 이들끼리 아무 말하지 않아도 말이 통했다. 고독의 독심술이 기가 막히게 통하던 시절이다. 아프면 같이 아파했고, 슬퍼지면 같이 슬퍼했다. 그 독하고 진한 고독과 외로움을 함께했으니 쉽게 잊힐 리 없다.     

           

경상북도 김천의 깊은 산골을 찾았다. 그곳에 터를 잡은 친구는 사람 좋기로 한정 없다. 이 친구의 도움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다. 하다못해 밥을 먹거나 술을 마시더라도 이 친구가 주로 계산했다. 그땐 몰랐다. 형편이 나으니까 그런가 보다. 생각이 짧았다. 친구의 형편이 넉넉한 것이 아니라 마음이 넉넉했다. 내 돈 아깝지 않은 사람이 세상에 어디에 있으랴. 한 번도, 단 한 번도 친구가 얼굴을 찡그린 걸 본 적 없다. 어떤 일에서건 말이다.    

            

10명의 친구가 한꺼번에, 한날한시에 서울, 부산, 대구에서 들이닥치는 게 어찌 보통 일인가. 먹을거리야 우리가 다 장만한다고 해도 손님 치르면 잔손이 얼마나 가고 성가신 일인가. 친구의 후덕한 마음이야 익히 아는 바지만, 친구의 아내에게 미안함과 고마움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는가. 깊은 산골이고 농장이 제법 커 친구들이 하루 묵을 수 있다는 것도 친구를 찾은 이유 중 하나다. 그렇지만 뭐니 뭐니 해도 친구가 베풀던 후덕함이 정말 고마워 얼굴을 보고 싶었다.


친구의 건강이 생사를 넘나들 정로도 나빠져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다행히 이곳에 와 자연 속에 살다 보니 건강이 꽤 좋아졌다. 수년 전 도시에 봤을 때 핏기가 없고 야위어 마음이 무척 아렸다. 그러던 친구의 얼굴에 화색이 돌고 몸에 살이 올라 보기 좋았다. 농장 주위에 단풍나무가 지천이다. 붉게 타는 산 그림자가 그의 얼굴을 물들인다. 젊은 날의 추억 조각들을 잃어버리지 않게 해 준 그가 정말 고맙고 대견하다.         

        

차요테(Chayote)가 자라는 산골짜기의 아열대 과일 농장

차요테(Chayote)


친구 부부는 차요테(Chayote), 열매 마, 동아라는 신기한 이름의 작물을 재배한다. 아열대 과일이라 재배하기 여간 까다롭지 않다. 그런데도 친구 부부가 이곳 산골에서 대량 재배에 성공했다. 이곳 산골짜기에서 아열대 작물 재배에 성공했으니 그 소식이 알려지지 않을 리 없다. 몇 번이 TV에 소개되기도 했다. 친구의 소식이 궁금할 때마다 유튜브에 접속한다. 그곳에서 친구 부부를 만난다. 이제 어엿한 스타가 됐나 보다.             

  

귀농 아니 귀촌한 지한지 불과 3년 남짓 만에 큰 농장을 가꾼 친구 부부의 강건함과 부지런함에 놀랐다. 2,000평이나 되는 산을 개척했다. 상전벽해라는 말이 딱 어울린다. 길도 없는 산골짜기에 길을 내고 터를 잡았다. 아열대 작물을 재배하는 철제 하우스가 얼추 다섯 군데가 된다. 작물을 따고 분류하는 작업실에다가 체험실까지 번듯하게 갖췄다.        


농장을 이름을 '비단꽃 농장'이라 지었다. 비단이 뜻하는 한자어와 꽃을 표하는 한자어는 본래 친구 부인의 이름이다. 농장 이름을 그냥 지은 게 아니다. 깊고 이쁜 뜻을 담았다. 농장 주인 부부의 감각이 남다르다. 착한 마음을 가진 친구 부부가 비단 꽃처럼 아름다운 시간을 보내었으면 하고 간절히 바란다. 


차요테를 먹어보니 맛이 꽤 신선하고 상큼하다. 차요테는 무의 단맛이 살짝 난다. 매운맛을 뺀 무의 상큼함이다. 미네랄 및 비타민이 풍부한 차요테는 기억력 개선 및 두뇌 활동 및 치매 예방에 도움을 준다. 비타민C, 엽산, 마그네슘 등 미네랄이 풍부하고 칼륨이 대량이 들어있어 피부 노화를 방지하고, 피부 수분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비타민, 마그네슘, 나트륨 배출에 효과적인 칼륨 등과 같은 미네랄리 풍부해 혈류 개선 및 고혈압, 혈관계 질환 예방에 도움을 준다.        

                      

밤은 깊어 가고 영혼은 기분 좋게 취하고     

차요테, 동아, 열매 마를 안주 삼아 밤이 늦도록 권커니 잣거니 술잔이 돈다. 제법 큰 동아의 속을 파내고 그 안에다 닭백숙을 끓였다. 수분이 얼마나 많은지 물을 하나도 넣지 않고 오직 동아 수분만으로 10명이 넘는 사람이 먹을 양을 만들었다. 한마디로 국물 맛이 끝내준다. 시원하고 개운하고 상큼하면서도 닭백숙의 고소함이 배었다. 닭살의 부드러움이야 말할 필요가 없다. 입안 가득히 퍼지는 그 고소함과 적당한 쫄깃함은 지금까지 먹어본 닭백숙 가운데 으뜸이다.   

             

술잔이 한 순배 두 순배 돌아도 마음이 청아하다. 도시에서 느끼는 불콰한 취기가 아니라 영혼의 맑은 취기를 느낀다. 다들 적당히 기분이 좋아진 모양이다. 마치 밤이 영원한 것 같은 착각에 빠지고, 이야기는 꼬리를 문다. 깊은 산골이라 노래방 기계가 있을 리 없다. 때론 젓가락 장단이 나오고 때로는 스마트 폰 소리에 맞춰 노래를 부른다. 그 시절에 목이 터지라 불렀던 그 노래를 소환했다. 마치 ‘슈가맨’을 찾듯 기억 너머에서 사라질 법한 노래를 찾았다.                


그렇게 산골의 밤은 깊어가고 우정도 깊어간다. 가을바람 소리는 조용히 산골짜기를 타고 내려온다. 하얀 별빛이 꽃잎처럼 술잔에 떨어진다. 술잔이 흔들리는 건 별빛의 자유낙하 때문일 것이다. 친구의 얼굴과 별빛을 담은 술잔을 마신다. 마치 젊은 시절의 그 밤으로 돌아간 것 같다. 걱정도 미련도 후회도 없었던 그 밤들의 시간 말이다.


비단꽃 농장의 아침 하늘


이른 아침의 공기가 싸하고 코를 찌른다. 코끝이 얼얼한 게 제법 따끔하다. 산골의 신선함이 주는 기분이 좋은 아픔이다. 인디고 블루의 하늘에는 하얀 구름이 다채로운 모양을 연출한다. 날이 채 밝지 않아 숲은 아직 어둑어둑하다. 스마트 폰의 카메라 성능이 참 좋아졌다. 깊은 산골의 가을 아침을 멋지게 연출한다.  


 멀리 소로우의 『월든』숲을 찾을 필요가 없다. 이곳에 오면 조용한 숲 속의 정취를 만끽할 수 있다. 도로라고 해봤자 차 한 대가 겨우 지날 정도의 시메트 길이다. 한겨울 눈이라도 오면 고립되기 딱 좋은 곳이다. 친구 집에서 조금 내려가니 산 아래 마을이 보인다. 그곳 들판에는 농부의 손을 기다리는 황금물결이 일렁인다. 마지막 가을 햇살을 즐기느라 잘 익은 벼들은 연신 고개를 주억인다. 고즈넉한 산골짜기에도, 저 멀리 황금 들판에도 분부신 햇살이 살포시 내려앉는다. 그렇게 나는 20대 초반의 어느 가을로 추억 여행을 다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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