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그리고 가을 본색(本色)

by Henry

풍요로운 결실과의 결별

숨겨둔 단풍 본색을 드러내는 가을

긴 겨울을 나기 위해

여윈 마지막 잎을 떨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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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앗이 썩어야 새순 돋고

새순이 사라지면 꽃이 피고

꽃이 떨어지면 열매 맺고

초록이 떠나면 단풍 들어


죽어야 사는 건 씨앗만 아니야

여름의 초록이 떠나야 가을 색이 살고

추색(秋色)이 죽어야 하얀 겨울이 오듯

죽어야 사는 건 모든 생명체의 숙명이지


낡은 것은 떠나야 새것이 오고

시간이 흐르면 그 또한 낡고

다음에 올 것을 위해 자리를 넘기고

조용히 떠나야 하는 게 인생인 것을


이제 며칠 후면

더욱 풍성해진 부드러운 햇살에

가을 들녘은 나락 이삭을 일구고

푸성귀를 풍성하게 자라게 하겠지.


이윽고 가을걷이 끝난

들판의 볏단 더미는 가을의 종말을 알리고

봄부터 부지런히 달려온 계절을 마무리할 거야.


가을은 죽어야 사는 모순의 계절

찬 바람이 불면 더 짧아진 햇빛 탓에

광합성 작용을 끝낸 가지가

긴 겨울나기 위해 초록색을 버리고

화려한 색으로 삶의 마지막을 위장하는

알고 보면 추색(秋色)은 지독히도 모순의 색이야.


어느덧 하루해가 손수건 한 장으로 짧아지면

한 스푼 남짓한 한낮의 햇빛으로

하루를 견뎌야 하는 나무의 깊어 가는 고민


잎자루에 코르크처럼 단단한 세포층(떨켜)을 만들고

떨켜는 눈물을 머금고 잎으로 가는

영양분과 수분을 차단하면

한여름 초록색 잎 아래 숨죽이던

탄닌의 갈색, 카로티노이드의 노란색과 주황색

안토시아닌의 빨간색이 본색(本色)을 드러내지


여윈 가지 끝에

한 뼘 남은 햇살이 힘겹게 매달리면

늦은 가을은 성취와 허무

결실과 조락 사이에서 방황하다

긴 겨우살이를 위해

끝내 마지막 잎을 떨구겠지.


나무는

제 한 몸 건사하고 다음 해 봄날을 기약하느라

잉태하고 키운 잎과 열매와 작별을 고하고

잎들을 떨군 후회와 자책으로

한겨울 찬바람을 받으며 몸을 떨며

죽음보다 더 깊은 침묵에 빠져들겠지


계절이 바뀌는 것이 서럽고

떠나는 여름의 미련이 남아서일까

아니면 누군가의 애틋한 기다림이

쌓이고 쌓인 탓인가

오늘도 추적추적 비가 내려


여름은 길었고

더딘 가을 탓에

올해 유난히 잦은 비가 가을을 재촉하고

덕분에 휴식하고

빽빽한 삶의 캔버스에 한 뼘 여백으로

창밖을 내다보며

아라비카 원두 100% 커피를 마시는 즐거움도 좋아.


먼 남쪽의 항구 도시에 있는

지인이 직접 정성스레 로스팅해서

보낸 커피라 그런지

산미가 살짝 돌면서 깊은 맛이 나는 게

오늘처럼 비 내리는 날

마시기에 풍미가 너무 좋아.


여름 떠나면 가을 오지만

우리 청춘 떠난 자리에는 무엇이 올까

지혜와 슬기로움

관조와 깊은 통찰이 온다고

애써 위안하면 살아야지.


왜 우리 삶은

낡은 것을 보내면 새것이 오는

그런 모순이 일지 않을까

아쉬운 마음도 없지 않지만

내리는 비를 보며

한 모금씩 커피를 홀짝이며

이만하면 살만하다고 위안도 해 보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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