뱃속 아기의 성별을 알게 되던 순간
임신 13~16주 차 정도가 되면 모든 부모들이 거쳐가는 통과의례가 있다. 뱃속 바로 아이의 성별 판단. 요즘은 희한하게 '젠더 리빌'이라는 이름으로 갑작스레 트렌디한 느낌의 옷을 입고 호명되기도 한다. 서양문화의 영향인지 요즘은 우리나라에서도 '베이비 샤워'에 이어 '젠더 리빌 파티'(사람들을 모아놓고 아들인지 딸인지 공개하는 파티)를 여는 경우를 주변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친척들이나 친구들도 나에게 젠더 리빌 파티는 따로 안 하냐고 묻기도 했는데, 그러한 이벤트가 어쩐지 우리에게는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새로운 풍습(?)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즐기는 사람들을 폄하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러한 의미 부여가 어쩐지 우리 부부에겐 어울리지 않는다는 판단이었다.
임신 중기가 되면 임신의 경험은 급격하게 젠더화되기 시작한다. 맘카페나 임신 관련 커뮤니티에서도 태아 성별 논의가 무척 활발하게 이루어진다. 딸이면 어떻고 아들이면 어떻다는 이야기들이 주를 이룬다. 부모가 될 사람이라면 관심 갖게 되는 주제라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대표적으로 나오는 주장은 1) 아들보다 딸이 애교도 많고 부모가 늙어서도 효도한다, 2) 딸은 예민해서 맞춰주기 힘들지만 아들은 단순해서 좋다... 이런 류의 것들이다. (우리가 감정 노동자나 요양 보호사를 구하기 위해 아이를 낳는 것은 아니지 않나...)
임신과 출산 과정에 있어서 아이의 성별은 최대 관심사 중 하나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젠더화되어 있고, 아이의 인생이 어떤 방식으로,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또한 성별에 따라 많이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남성으로서 경험하게 될 사회의 모습과, 여성으로서 경험하게 될 세계가 많이 다르다는 건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다. 임신을 하는 순간 특정 성별을 원하게 되는 경우도 많은데, 부모 자신이 본인의 성별로 인한 사회적 경험이 유쾌하지 않았다거나 하는 이유도 꽤 있다.
특히 한국 사회는 남성성, 여성성에 대한 기준이 사회적으로 꽤 견고하게 형성되어 있는 편이라 성별 판단 단계는 더욱 비중 있게 다뤄진다. 학창 시절 체육시간만 생각해 봐도 남학생들은 밖에서 뛰노는데 여학생들은 체육 활동에서 배제, 소외되는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가. 이것은 내재되어 있는 육체적 특성 때문이 아니라 사회적 규범에 해당한다. 가까운 나라 일본만 해도 여학생의 운동부 활동이 보편적이고 당연하다는 데에서 한국적 특수성을 알 수 있다. 아무튼 남자다움, 여자다움에 대한 바운더리를 쉽게 넘나들지 못하는 우리 사회에서는 아이를 품는 순간에서부터 성별 기대감이 클 수밖에 없다.
그들에 따르면 이런 정체성이 생산되는 순간은 삶의 형태뿐 아니라 여성과 남성의 신체는 물론 아직 젠더화가 되지 않은 신체에서도 표출된다. 그러니까 신생아는 의사가 "딸이에요!"라고 외치는 순간 여자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생물학적 성별 역시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수행 행위를 통해 만들어진다. 해부학은 프로이트가 말한 대로 '운명'이 아니라 헤게모니적 담론의 산물이다. 이성애적 매트릭스의 창조물인 것이다.
스베냐 플라스푈러 등, <부모가 된다는 것> 中
'젠더는 수행하는 것'이라는 포스트구조주의 페미니즘적 관점에 어느 정도 동의하는 입장이기에 시중의 아기 성별 담론에 항상 비판적으로 접근하려고 해 왔다. 마이너 하지만 간혹 가다 댓글에 '딸 같은 아들도 있다', '우리 딸은 남자보다 털털하다'는 반응도 있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생각조차 이분법적 성별 프레임에 갇혀 있지는 않은지 생각하곤 한다.
정말로 '여자색' '남자색'이라는 게 있는 걸까. 여자 아이들은 인형놀이를 좋아하고, 남자아이들은 로봇과 중장비를 좋아한다는데 사실일까. 이러한 육아용품 또한 장난감 산업의 성별화된 기획에 따른 것이고, 선호하는 색깔이나 아이템은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 들어간 후 또래집단을 보고 학습한 것에 불과하다는 주장도 있다. 반면, 실제 육아를 겪은 엄마들은 아이들이 아주 어렸을 때부터 성별에 따라 다르게 말하고 행동한다는 것을 증언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 또한 젠더수행론에 100% 동의하는 건 아니고, 생물학적 요인을 아예 배제할 수는 없다고는 생각한다. 어디까지나 세상엔 일관된 경향성이나 주류화된 흐름이라는 게 있기 때문이다. 내 주변 남자아이들과 여자 아이들의 서로 다른 성향을 볼 때면 이 생각은 더욱 굳어지곤 한다.
아무튼 결론적으로 우리 아이의 성별은 아들이었다. 13주 차 정도에 병원에 방문해 알게 되었는데, 초음파 사진에서 무언가가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제 내 안에서 페니스가 자란다. 아들, 아들이다!
스베냐 플라스푈러가 <부모가 된다는 것>에서 썼던 위의 문장 그대로였다. 내 안에서 페니스가 자란다니! 신기하고도 오묘한 기분이었다. 마침내 성별이 아들이라는 이야기를 들으니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요즘 인기 있는 유튜브 <태요미네> 태하처럼 우리 아이도 저렇게 꼬마아이가 되겠지. 길에서 마주치는 10대 남자아이들을 보면서 우리 아이도 저렇게 청소년이 되겠지. 휴가를 나와 군복을 입고 돌아다니는 군인들을 보면 우리 아이도 무려 군대에... 가겠지.....(헐!) 이런 상상에까지 도달하니 머릿속이 막 하얘졌다.
요즘은 하도 딸을 많이 바라는 세상이라 나도 딸 키우는 상상을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아무래도 같은 성별이면 엄마로서 더 잘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자라면서 알려줄 수 있는 게 더 많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에너지 많은 남자아이가 나온다면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도 있었다. 하지만 내가 딸에게 해줄 수 있는 역할을 거꾸로 남편이 아들에게 해줄 수 있다면, 한번 키워볼 만하지 않을까. 남편을 닮은(아니, 살짝 상위호환 버전의) 아들이라면 괜찮지 않을까.
연애를 시작하기도 전부터 남편은 나보다 훨씬 아이를 잘 키울 것 같다고 생각하곤 했었다. 아이랑 누구보다 잘 놀아주고 육아에 관심 많은 남편이 아들을 키운다면 어떤 그림일지 궁금해졌다. 우리 아이 성별이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저녁, 남편이 휴대폰 메모장에 '아들과 같이 할 것' 리스트를 적어온 것을 보고 눈물이 핑 돌았다. 거기에는 각종 운동이나 체스 같은 것들이 빼곡하게 적혀있었다. 아들이라 좋고, 너무 기대가 된다면서. 성별이 나오니 아이라는 존재가 보다 구체화되는 기분이었다. 평소에 손녀 타령하던 우리 아빠가 "아들이면 어떻고 딸이면 어떻냐"라고 말해주던 순간도 무언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진한 감동이었다.
아들이든 딸이든 남자다움, 여자다움이라는 틀에 갇히지 않고 키우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저 우담이라는 태명처럼 우직하고 담담하게. 자기답게 사는 아이로 키우고 싶다. 남자로 태어나도 여자가 되고 싶을 수도 있고, 전통적인 성별 규범을 거부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므로. 아무튼 나는 모든 가능성에 열려있는 편이다. 아이가 자라면서 젠더와 섹슈얼리티를 어떻게 수행할지 나는 모르는 일이니 말이다. 부모가 줄 수 있는 건 그저 무한한 사랑과 지지, 지원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