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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비 파일로의 감정을 남기는 옷, 그 하나

by 루미 lumie


피비 파일로의 벌룬 탑, 이름 없이 감정만 남는 옷


무언가를 말하기보다, 감정을 남기고 사라지는 옷이 있다.

Phoebe Philo의 벌룬 탑은 나에게 그런 옷이다.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이 블라우스는,

입을수록 ‘감정’이 되는 조형, 그리고 ‘기억’이 되는 실루엣을 남긴다.


벌룬처럼 부풀어 오른 소매는 단지 장식이 아니다.


그건 어떤 침묵의 반사광처럼, 팔꿈치 아래에 그려진 감정선이다.

검정과 아이보리의 이중 구조는, 피비 파일로가 늘 그래왔듯 절제의 미학 안에서만 완성된다.




‘Sugar Top’이라 부르고 싶은 감정


브랜드는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이 옷을 마음속으로 ‘슈가 탑’이라 부른다.

입술 안쪽에서 사르르 녹아 사라지는 것, 어릴 적 과자 봉지의 마지막 사탕처럼

기억 저편에서 단단하게 응고되다 결국, 감정이 되는 구조.


아무도 웃지 않아도, 아무것도 과시하지 않아도,

이 옷을 입은 사람은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다.

그건 선이 만들어주는 품격이 아니라, 감정이 남기는 잔상에서 온다.



조형, 구조, 그리고 피부에 닿는 조용한 볼륨


이 탑은 단지 소매에 볼륨을 준 옷이 아니다.

어깨에서 팔꿈치까지, 손끝이 아닌 몸 안쪽에서 퍼져나오는 조형 감도.

가볍게 드레이프된 몸판의 미니멀함은, 소매의 극적인 감정을 더 깊이 끌어안는다.

입는 사람의 체형을 방해하지 않으며, 오히려 ‘공간’을 열어준다.


나는 어깨선이 강하지 않은 체형이지만, 이 탑은 그런 나에게도 충분히 어울릴 듯 하다.

오히려 어정쩡한 퍼프보다, 이렇게 구조적으로 ‘의도된 조형’이

감정과 실루엣을 동시에 정돈해 준다.




피비 파일로의 조용한 리듬


이 옷은 런웨이도 없이 등장했다.

패션쇼도, 드라마틱한 사운드트랙도, 박수도 없었다.

그저 조용히 업데이트된 컬렉션 D의 룩북 속에, 무심하게 자리해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순간, 나는 샤넬에서 컬렉션을 곧 선보일 마티유 블라지의 기조와는 또 다른

‘반응하지 않는 고요한 미학’을 이 옷에서 느꼈다.

온몸으로 외치는 옷과,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침묵으로 감동을 주는 옷.

이 둘 사이에서 나는 피비 쪽을 택하고 싶어진다.




결론: 나는 이 감정을 오래 붙잡고 싶다


사실 이 옷을 당장 입을 일은 많지 않을지도 모른다.

벌룬 소매는 언제나 망설임을 만든다.

하지만 ‘벌룬탑’이 아닌 ‘피비의 벌룬탑’은 다르다.


그건 단지 옷이 아니라, 한 시대를 떠났던 디자이너가

돌아와서 조용히 속삭이는 “괜찮아, 네 방식대로 입어도 돼.”라는 말 같다.


그래서 나는 이 옷을 기억 속에 오래 간직할 것 같다.

이름도 없고, 설명도 없지만, 슈가처럼 사라지지 않는 감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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