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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마스 Jan 20. 2018

잠 못 드는 밤, 눈은 내리고

부제: 쟈코모 교수님

2014년 11월의 어느 날.

다음 날까지 제출해야 하는 숙제를 붙잡고 끙끙 대길 몇 시간, 시계를 보니 어느새 새벽 2시다. 하던 숙제를 잠깐 멈추고, 모두 잠든 이 시간이 허락한 고요함을 잠깐이나마 즐겨보기로 한다. 의자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한번 쭉 켜고, 밤 풍경을 바라보기 위해 창문으로 다가갔다. 아, 그런데 창밖에는 함박눈이 떨어지고 있었다.


가로등 불빛을 받아 아름답게 쏟아지고 있는 그 눈들을 보니, 나도 모르게 감성적이 된다. 아니, 그 누군들 새벽 2시에 창밖으로 내리고 있는 함박눈을 보면서 감성에 젖지 않으랴. 역설적이지만, 몇 시간 뒤가 데드라인인 숙제를 아직 끝내지 못한 사람에게 이 순간은 여느 때보다 더 낭만적인 순간이리라.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 동에서 지금 이 시간에 환하게 불이 켜진 곳은 아마도 내 방뿐일 것이다. 마치 어두운 밤에 홀로 빛나고 있는 등대에서 어두운 밤바다를 바라보는 등대지기처럼, 의자에 앉아 멍하니 어둠 속에 하얀색 점을 쉴 새 없이 찍고 있는 눈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자연스레 생각은 한국으로 향한다. 불과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매일 아침 지하철로 출근하고, 동료들과 점심 식사를 한 뒤 짧게나마 산책을 하고, 퇴근 후 지친 몸을 이끌고 다시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생활을 반복했었다. 그런데 지금 나는 낯선 미국에서, 새벽 2시에 도저히 풀리지 않는 문제를 어떻게든 풀어보려고 애쓰는 늦깎이 학생이 되어 있구나. 한밤 중에 기습적으로 내리고 있는 창밖의 함박눈 덕분에 나는 그렇게 한참 동안 한국에 두고 온 추억들을 오랜만에 하나하나 꺼내 보았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숙제는 쟈코모 교수님이 내주신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쟈코모 교수님의 숙제 제출일 전날은 밤늦게까지 문제를 풀다가 유독 이렇게 감성에 젖는 날이 많았던 것 같다. 이탈리아 출신의 쟈코모 교수님은 다른 학교에 계시다가 이번 학기에 우리 학교로 옮기신 분이신데, 수업을 굉장히 열성적으로 하시고 성격도 좋아서 동기들 모두가 쟈코모 교수님을 좋아했다. 특히 이탈리아 남자답게 패션이 남달랐는데, 얼굴도 잘 생긴 데다가 체격도 좋아서 전혀 신경 안 쓴 것처럼 대충 입은 옷들도 어찌나 그렇게 하나같이 멋있게 보이던지... 하지만 여러모로 완벽한 쟈코모 교수님에게도 딱 하나 불만 사항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숙제와 시험 문제가 너무 어렵다는 것이었다.


미국은 우리나라에 비해 숙제 비중이 굉장히 높은 편이다. 주로 숙제는 수업 시간에 다룬 내용들을 활용해서 좀 더 어려운 문제들을 풀 것을 요구한다. 그런데 쟈코모 교수님의 경우, 숙제의 난이도가 너무 높아서 아무리 시간을 들여도 좀처럼 풀리지 않는 것들이 많았다. 그래서 숙제 제출일 전날에는 동기들끼리 도서관에서 밤늦게까지 같이 머리를 맞대며 문제를 풀곤 했고, 몇몇은 아예 학교에서 밤을 새우며 숙제를 하기도 했다.


이렇게 동기들 대부분이 쟈코모 교수님 수업에 상대적으로 많은 시간을 쏟았다 보니, 중간시험을 치르기 전에는 교실에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런데 숙제만큼이나 시험 문제도 까다로웠다. 시험이 진행되는 2시간 30분 동안 나름 문제를 풀려고 열심히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답을 찾지 못했다. 시험 답안을 제출하고 교실을 나오는데, 어찌나 우울하던지...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여자 동기들 몇 명은 시험이 끝나고 그 자리에서 바로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며칠 뒤 시험 결과가 공개되었는데, 평균은 100점 만점에 54점이었다. 내 점수는 51점이었는데, 평균보다 낮은 점수를 받았다는 게 적지 않은 충격이었다. 이른바 '정신적 대미지'가 상당해서, 나는 거의 일주일 동안 스스로를 자책했다. 수학 캠프부터 시작해 다른 두 과목의 중간시험을 꽤 만족스럽게 치러서 기대감이 올라간 탓인지, 평균 이하의 점수를 받아들이는 게 참 힘들었다.


아무튼 중간시험 점수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숙제 점수에서라도 만회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날도 새벽까지 안 풀리는 문제를 계속 붙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밖에는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고.... 그 이후로도 나는 한참을 문제와 씨름했고, 끝까지 안 풀리는 문제는 결국 어느 선에서 타협을 하고 오전 수업을 위해 나는 잠자리에 들기로 했다.



여전히 창 밖으로 내리고 있는 흰 눈 덕분이었을까? 비록 숙제를 만족스럽게 끝내지는 못했지만, 침대에 누워서 "눈 내리는 소리"를 (마음으로) 듣고 있노라니 어느 때 보다도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 중간시험이랑 숙제는 그냥 잊어버리자. 지금 내가 몇 개월 전의 서울 생활을 그리워하듯, 시간이 지나면 숙제한다고 잠 못 들었던 이날 밤의 함박눈도 분명 그리워질 거니까...

 

이윽고 나는 달콤한 잠의 세계로 기분 좋게 들어갔다. 혹시 이날 새벽에 내리던 눈에는 어떤 '신비로운 치유 능력' 같은 게 들어 있었던 건 아닌가, 지금도 가끔 그런 생각이 들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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