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중한

by 하이민

새벽 공기는 개찰구에 찍히는 숫자를 매달고 코를 훌쩍여댔다
밤새 한쪽으로 치우친 눈꺼풀과 반대쪽으로 기울어진 가방을 들쳐매고 굉음을 가르는 발자국은 그림자가 묻어 흐릿했다
뒤꿈치부터 물이 차오른 발은 흔적을 남겼다 다리에 먹물을 갈아 대충 그어버린
건지도 몰랐다 점을 찍어 부호라도 새겨볼까 하다가 그만뒀다

역과 역 사이를 지나치며 지는 것들을 스쳐갔다
끝내 질 수밖에 없는 일들은 기약없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으면서도 보이지 않는 하루를 닮았다
유리창을 타고 기어가던 하천이 쌓아 올린 산등성이
너머 해가 지다가 뜨다가 두둥실 떠다녔다
주먹만 한 구체가 품은 실제를 더듬어가다 눈을 감아버렸다
망막에 갇힌 항성은 새벽녘만큼 둔중했다

사그라드는 새벽이 자꾸만 덜컹거려 가방 안에 늘어놓았던 것들을 끄집어냈다
김 빠진 탄산수는 빛바래 끓어오르고 있었고 시꺼먼 아메리카노가 병째로 밤을 넘어가는데 반 이상 곰팡이가 슬어 물러진 귤 하나가 뚫린 구멍 사이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곯은 건 제때 떨궈내지 않으면 삭고 만다
좁은 곳에서 터져나가는 것들 사이에서 어쩔줄 몰라 발을
동동 구르는 사이 종점이었다 내릴 역은 이런 마지막이 아니었다
볼펜 똥에서 묻어난 날카롭고 가느다란 냄새를 쭉 뽑아내 손끝에 떨어지는 빗물을 잡아챘다

어느새 두 손에 물이 가득 담겼다

견딜 수 없이 고여버린 물은 퍼담아 나르기보단 차라리 마셔버리는 편이 나았다
한 모금씩 줄어드는 눈금만큼
손톱은 모나지 않게 다듬어 흔들리지 않았고 발가락과 손가락과
더 멀리 눈과 머리를 파내지 않고도 물 먹은 날이 굳어 갔다
울렁이던 바닥이 똑바로 설 수 있을 정도로 판판해지고 있었다
돌돌 말린 숨을 거꾸로 펼쳐내 햇빛에 바짝 말린 공기를 한입에 털어넣었다
이제야 입안이 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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