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환경도 적응하기 힘든데 혼자만 다르게 옷을 입으니 모든 사람들이 나만 보는 것 같고, 너무 부끄러웠다.
나의 첫 사수는 나보다 10살은 족히 어려보이는 사람이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르는 게 너무 많아서 수많은 질문을 했는데도 싫은 내색 없이 잘 알려줘서 고마웠다.
외래에서 가장 많이 하는 일은 환자들을 미리 예진하고 진료를 들어가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내성적이고 목소리도 작은 내가 환자들을 호명하고 대하는 것을 잘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게다가 처음 보는 병원 차트는 온통 영어만 가득해서 어려웠고, 어려운 글자 속에서 중요하게 표시해둔 주의 사항들을 빠르게 파악해야 했고, 혹시 하나라도 실수 할까봐 겁부터 났다.
하지만 내가 제일 잘하는 것이 꾸역꾸역 버티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버티며 어느새, 2주의 시간이 흘러갔다. 내 앞에 4명이나 일하던 사람들이 며칠 만에 그만두었기에 내가 조금이라도 예상 시간보다 늦으면 그만 둘까봐 다들 전전긍긍했다고 뒤늦게 전해 들었다.
1달간의 교육 기간이 있었지만,친절하게 알려주던 사수는 2주 만에 퇴사를 했고, 엄마 잃은 아기새처럼 남은 2주를 나는 매일 다른 사수에게 일을 배워야 했다. 아침마다 이것도 모르냐 어디까지 아느냐의 물음에서 싸워 이겨나가야 했고, 매일 바뀌는 사수들의 성향과 패턴에 따라가는 게 너무 힘들었다.
그러다 나는 아주 불호랑이 같은 사수를 만나게 되었다. 그 사수가 등장했을 때의 첫인상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마치 영화 관상의 수양대군이 등장하는 것처럼 아주 비범했고, 그분이 나오자마자 내 옆에 직원들이 홍해를 가르듯이 자리를 비켜주면서 깍듯이 대하는 게 인상적이었다. 그분의 경력은 무려 10년이었고 병원에서 가장 고참이었다. 카랑카랑한 목소리와 군대 선임 같은 스파르타 교육에 나는 더욱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애써 목소리를 크게 키워 놨던 성량도 호랑이 선임 앞에서는 목소리가 기어들어가며 못하는 사람이 되었고, 자신감은 점점 잃어갔다.
대놓고 목소리가 작고 일을 못한다고 혼이 났고, 환자를 예진을 하고 있는 와중에도 내 뒤통수에 대고 잘못된 점을 지적하고 꾸짖었다.
다시 크게 현타가 왔다.
나는 지금 여기에서 뭘 하고 있는 걸까. 어렵게 공부해서 자격증을 취득하고, 다시 마이너스에서 시작하려고 하는데 도대체 어디까지 버티고 이겨내야 할 것인가.
너무나 큰 산과 어려움들이 쓰나미처럼 몰려올 것이 뻔히 보였다.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앞선 걱정들에 갑자기 눈물이 왈칵 났다. 일을 하다 중간에 눈물을 훔쳐내며 애써 참아보려고 했지만, 콧물이 주룩주룩 나는 건 멈출 수가 없었다. 한번 나는 콧물은 멈출 생각을 안 했고, 너무나 부끄러운 이 상황 속에서 나는 비염이라서 콧물이 난다고 애써 거짓말을 하며 모면을 해야 했다. 아마 내 상황을 보면서 다들 눈치를 챘겠지만, 나는 그 상황에서 인정을 해버리면 지는 느낌이 들어서 끝까지 울지 않았다고 말하며 마지막 자존심을 지켰다.
여자 군대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연차가 중요한 간호 세계는 보이지 않는 질서가 가득했다. 신입들이 아침 일찍부터 정리해야 하는 루틴부터, 밥 먹으러 갈 때조차 선배들이 가고 나서 움직일 수가 있었다.
본격적인 막내 생활이 시작되었다. 매일 아침 1시간 일찍 출근해서 주사실 청소, 얼음 채워 넣기, 커피 자판기 청소, 시약 냉장고에 채워 넣기, 병동 환자 종이 인쇄하기,컴퓨터와 초음파 켜고 세팅하기, 기구와 검체 내려두기 등등 모든 준비 과정들을 막내 두세 명이 도맡아서 해야 했기에, 꼭두새벽부터 출근해도 할 일이 많아서 버거웠다. 하지만 이 생활들이 익숙해지다 보니 어느새 부지런히 움직이고 시간 여유가 생기는 지경이 되면서,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는 걸 다시 한번 깨달았다.
처음에는 내가 막내 생활의 일들을 하면서도 실수하는 것들을 선배들이 탐탁치 않아 하면서 꾸짖거나 뒤에서 내 욕 하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다년간의 사회생활을 해본 결과 언젠가는 다 지나갈 것이고, 나의 성실한 모습을 꾸준히 보여주면 나를 다시 봐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실제로 똑같이 실수를 한 상황이었지만, 시간이 지나고 중간 고참이 되니 아무 말 없이 지나가는 경험을 하면서, 텃세라는 게 참 무섭구나 또다시 실감하게 되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막내 생활을 버티고 1년 뒤 새로운 막내가 들어왔고, 나의 아침 루틴들을 전달하게 되었다. 진료 준비를 하기 위한 일이라서 잘해도 못해도 크게 티가 나지 않는 일이었지만, 원래 내가 하던 일을 전달할 때의 감정은 내 새끼를 보내는 것 마냥 뭔가 울컥했다.
내가 버틸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적어도 정해진 퇴근시간이 있었고, 퇴근 시간 후에는 연락이 오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었기에 소소한 행복함을 느낄 수 있었다.
눈감고 입닫고 귀막고, 인고의 시간이 흘러갔고, 나는 어느새 중간 고참이 되었다.
선배보다 많아진 후배들을 가르치며 내 노하우를 알려주게 되면서, 일의 양은 더 많아지고 책임감은 더 커졌지만 그만큼 살짝 여유가 생겼다.
인생에 있어서 높게만 보이던 큰 산을 넘기니 나도 모르게 맷집도 생기고 자연스럽게 시야도 넓어져서 뿌듯했다.
이런 뿌듯한 기분은 직접 고생하고 부딪쳐봐야 느낄 수 있는 경험이라서 더 값지고 성취감이 크게 느껴졌다.
작고 귀여운 월급만 빼고는 완벽한 워라벨의 생활에 익숙해지다보니 나는 그동안 하고 싶던 취미생활을 다시 하게 되었다.
인생의 어두운 터널 속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방법은 다양하고 어쩌면 내가 이루어낸 방법이 틀린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어두운 터널 속에서 갇혀서 내 자신을 혹사하면서 안 되는 것을 되게 할 시간도 여유도 없었다. 남들보다 많이 돌아 왔지만, 지금의 내 생활에 만족하면서 지내고 있다.
낮에는 8시간 근무 하는 평범한 직장인으로서 최선을 다하고, 밤에는 체력이 되는 한 2시간 이상은 그림을 그리면서 내 실력을 키우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언젠가는 멋지게 그림 그린 만큼 값어치를 할 수 있는 일러스트 작가가 되기를 꿈꾼다.
여자 군대 생활도 버티면서 해냈기에, 꾸준히 성실하게 그림을 그리면서 충분히 버티고 이겨낼 자신이 있다.
그동안 나는 찬란한 순간은 너무 멀리 있다고 생각했고 어쩌면 죽기 전에 오지 않을 수도 있다고 막연하게 생각해왔다. 하지만 행복한 순간들은 일상 속에 있지만,그동안 스쳐지나갔다는 것을 어느새 깨달았다.
아침에 건강하게 깨어나는 순간, 부모님과 함께 먹는 식사, 출근 시간을 지켜주는 제 시간에 도착한 버스, 생활을 할 수 있게 돈을 벌 수 있는 직장이 있다는 것, 퇴근 후 달콤한 휴식을 할 수 있는 순간, 내가 하고 싶은 취미생활을 할 수 있는 시간들,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해주는 친구와 연인 그리고 가족이 있다는 것, 아름답게 노을 지는 하늘을 바라보며 산책하는 순간, 창문 밖 계절이 바뀌면서 피고 지는 꽃과 나무의 변화들, 더위와 농작물들이 잘 자랄 수 있게 내려주는 시원한 단비 등 이때까지는 우리가 너무 당연한 일상이라 소중하게 느끼지 못했던 순간들, 그 자체가 행복이고 찬란한 순간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작지만 소소한 시간들이 쌓이면 빛나는 내 인생의 찬란한 순간들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그 속에서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성실하게 차곡차곡 쌓아 올리다 보면 언젠가는 내가 원하는 나의 모습이 되어있지 않을까? 하며 행복한 미래를 상상해본다.
여러분 찬란한 순간은 바로 지금 이 순간이예요.
지금을 즐기고, 일상의 소소한 순간들을 다시 한번 들여다보면서 값진 시간들을 아껴쓰길 응원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