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참을 방황을 하고 있는데 부모님의 솔깃한 제안에 혹하게 되었다. 부모님이 편의점을 지인 소개를 통해서 운영을 하게 되었고, 나와 함께 하자는 제안이었다. 일도 훨씬 쉬울 거고, 원하는 시간에 일하고 퇴근하고, 남는 시간에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해라는 달콤한 제안이었다. 수동적으로만 살던 내가 원하는 데로 자유롭게 일을 할 수 있다니 그 제안을 안 받아들일 이유가 없었다. 빠르게 퇴사를 결정하고, 편의점을 같이 운영하게 되었다. 전날 까지 회사에서 야근을 하다가 순식간에 그 다음날 편의점 캐셔가 되었다. 너무나 쉽고 만만하게 편의점 일을 생각했던 우리는 대비를 전혀 하지 못한 채 날이 갈수록 편의점 현실의 어려움과 풍파를 정통으로 맞으면서 철저히 부서지기 시작했다. 각자의 건강도, 가족들의 신뢰도와 관계도 무너졌다. 무엇보다 나는 교육을 전혀 받지 못하고 편의점 일에 뛰어들게 되어서 발주부터 마케팅 방식을 전혀 알지 못했다.
무턱 대고 일을 시작하는 것은 부모님을 닮은 것이었을까, 부모님은 내가 젊으니까 교육을 받지 않아도 충분히 할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믿음이 있었다고 한다. 어른들이 생각하는 젊은이들은 컴퓨터나 기계를 빠르게 습득하고 잘 다룰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 같은 것이, 생계를 책임지는 일에도 침투가 된 것이었다. 세심하게 신경 써야 하는 물건 발주부터, 행사 상품의 진열과 상품 구성, 상권 분석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시작했던 나는 어느새 스스로 맨땅에 헤딩을 하며 일을 하고 있었다.
울며 겨자 먹기로 잘 팔리지 않은 빵들을 많이 시켜서 여러 개 폐기를 하게 된 날이 있었다. 그때 부모님이 처음으로 발주를 제대로 해라고 크게 화를 냈다. 나도 처음 해보는 발주, 교육도 받지 않은 상태에서 내가 잘 팔릴 것 같은 제품을 예측해서 갯수까지 정확하게 발주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부모님도 불규칙한 생활에 힘드셨고 나 또한 수면 부족으로 매우 예민했기에, 서러움과 울화통이 동시에 터지게 되었다. 일을 하다가 나도 모르게 가게를 박차고 집을 나오게 되었다. 반나절 정도 되는 가출 시간이었지만, 정말 지옥 같은 이 생활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영혼이라도 팔고 싶을 만큼 괴로웠다. 가족들과 경영하는 것을 함부로 하지 말라는 조언들을 무시했던, 또 그 제안을 너무나 쉽게 받아들인 과거의 내가 너무나 원망스러웠다.
부모님의 진심 어린 사과에 나는 한걸음 물러섰지만, 날이 갈수록 부모님은 젊은 나이를 내세워 모든 매장의 상황들을 나에게 의지하기 시작했다. 매장에서 절도하는 도둑을 찾기 위한 순간보다, 계산 실수하는 부모님의 시제를 맞추기 위해 CCTV를 돌려보는 일이 더 많았다.
물건 발주를 전혀 하지 못했던 부모님을 대신해서 24시간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을 같은 시간에 발주해야 했다. 서울에서 얼떨결에 일한 나 자신을 제대로 알지 못한 것처럼, 이번에도 나는 같은 실수를 반복했다. 알고 보니 편의점은 24시간 내내 운영을 해야 했고, 가족들과 다 같이 운영하기에는 일손이 턱없이 부족했다. 부모님과 일을 나눠서 한다고 해도, 24시간 주7일을 평생은 할 수 없었다. 고민 끝에 야간 알바생을 고용하게 되었다. 야간 알바생의 교육부터 매장 재고현황까지 내 몸을 몇 개라도 나눠서 생활하고 싶을 만큼 할 일이 너무 많았고, 부모님이 나에게 의지하는 크기는 점점 커져만 갔다.
2년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긴장하며 일했다. 그렇게 나는 남은 영혼과 힘을 다 끌어다 편의점에 쏟아 부었고, 근처의 경쟁 편의점들을 문을 닫게 만들고 , 매장 운영 6개월만에 처음으로 매출도 손익분기점을 넘게 되는 쾌거를 맛보게 되었다. 점점 안정화를 찾아가며 2년 만에 처음으로 주1회 쉴 수 있게 되었다. 쉴 수 있는 날에는 정말 아무것도 안 하고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할 수 있을 줄만 알았다. 하지만 내가 가게를 나선지 5분도 되지 않아 부모님이 나를 찾는 전화로 핸드폰은 불이 나기 시작했다. 잠자고 있는 내 방에 들어와 조용히 내가 깨어나기만을 기다리는 엄마의 눈을 아직도 잊혀 지지가 않는다. 귀신이라도 본 것 마냥 놀라서 일어나자마자 짜증부터 냈고, 제발 온전히 나를 내버려두라는 말을 반복하고 소리를 질러댔지만 현실은 24시간 쉬지 않고 불이 켜져 있는 편의점 간판처럼 멈추지 않았다.
3년간의 계약기간이 끝나갈 때쯤, 그동안 엄마는 우울증을 아빠는 목 디스크를 나는 위장장애와 화병, 발가락 골절로 쇠약해지기 시작했다. 다시 계약을 해야 하는 날까지도 엄마는 단호하게 편의점 운영 하는 마음으로 기울여져 있었다.
여느 때와 다름 없이 편의점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저녁에 물건들을 냉장고에 넣으며 정리를 하고 있는데, 냉장고 안에 센서가 깜빡이며 꺼졌다. 그리고 가게 전체가 정전이 되었다. 그 순간 입 밖으로 목소리가 전혀 나오지 않았고, 입만 벙긋 대며 답답해했다.
생생한 꿈이 예지몽이었던 걸까, 엄마의 생각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힘들어하는 나와 아빠의 모습을 보며 24시간 돌아가는 편의점 간판의 불과 내 꿈처럼 이제는 꺼야겠다는 생각을 하셨던 것 같다. 계약 종료를 하고, 다음 계약자에게 가게를 넘기는 날은 정말 시원섭섭하고 내 새끼를 입양 보내는 것 마냥 힘들었다.
부모님과 나 자신에게 그동안 수고했다는 의미로, 내가 성인이 된 이후로 처음으로 함께 여행을 다녀오며 충전을 하기로 했다. 누구보다 치열하게 지내며 3명이서 단 한 번도 함께 쉴 수 없었던 날들을 겪어보니, 별 거 없이 여행을 하는 시간도 함께 하는 것 자체가 의미 있었기에 너무나 소중하게 느껴졌다. 제주도 여행 마지막 날, 식당에서 밥을 먹는데 tv에서 코로나가 발생되었고, 중국에서 전염이 되기 시작했고 특히 제주도에서 중국 관광을 조심해라는 뉴스를 보게 되었다. 그리고 코로나로 다음 편의점 계약자가 1년 안에 3번이나 바뀌었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들었다.
치열하게 살며 제발 벗어나갈 간절히 바라던 시간들도 돌아보면 다 아름다운 경험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다시 돌아가도, 부모님과 동업은 절대 하지 않을 것이지만 그때 나는 느꼈다.
부모님의 컴퓨터를 잘 하지 못해서 발주를 나에게 의지하며 부탁하신 것처럼, 내가 의지할 사람이 없으니 어떻게든 상권 분석을 하고 편의점 슈퍼 바이저에게 도움을 구해서 해내려고 하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몸으로 부딪쳐서 경험을 하다 보니, 남들보다 빠르게 편의점 매출의 목표도 이룰 수 있었다.
나는 내가 남에게 의지만 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환경적으로 상황이 변하니 자연스럽게 내가 독립적인 사람으로 변해있었다.
그리고 그때의 경험으로 뭐든 나 혼자서도 잘 할 수 있다는 자신감, 끝까지 해낼 수 있는 끈기가 생겼다.
어떤 환경 속에서도 내가 배울 점이 하나 있다면,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드는 게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경험을 토대로 나는 절대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글쓰고 그림 그리는 작가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