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찍어요.
아마 초등학교 6학년 때였을 것이다. 아빠께서 내게도 도장이 필요하다시며 인감도장을 선물해 주셨다.
빨간색 아랫단에 투명한 몸체에는 조개껍데기와 해초와 빨간색 꽃잎이 있었다.
조개껍데기는 진짜 일지 몰라도 검은색 해초와 빨간색 꽃잎은 아마도 진짜가 아니고 검은 실과 빨간 천조각으로 그 모습을 정교하게 구현한 것 같았다. 아빠께서는 크면 이 도장으로 문서에도 찍고, 중요하게 쓰일 거라면서 '우리 아기' 잘 간직하라고 하셨다. 오빠가 옆에 있었다면 또 한소리를 했을 것이다.
"아버지, 이 녀석도 다 컸는데 무슨 '아기'예요."
그러면 아빠는 항상 이렇게 대답하셨다.
"아빠한테는 죽을 때까지 아기다. '마지막 아기'야."
난 그 도장을 받으며 기분이 몹시 좋았다. 나도 어른처럼 도장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요즘 말로 표현하자면
'나 인감 있는 어린이야.'
나중에서야 알았다. 그냥 인감도장이라고 파둔다고 다 인감도장이 아니라는 것을.
"여보, 나 인감도장 있어. 나 어릴 적에 아빠께서 파주셨어."
"여보, 그거 인감도장 등록해야 인감도장인 거야."
쿠쿠쿵.
난 정말 세상 물정 모르는 어른이다.
아빠의 바람과 나의 기쁨과는 별개로 저 도장은 거의 쓰이지 않았다. 사회초년생이 되어 드디어 내 도장을 쓸 수 있겠구나 기대했지만, 회사에서 쓰고 있는 도장과 형태가 달라서 쓰지 않았다. 이직한 후에는 회사에서 업무도장을 파주었다. 개인도장이 있으면 가져와도 된다고 했지만 수시로 결재 서류에 찍어야 하는데 행여나 유리로 된 몸체가 깨질까 염려되어 사용하지 않았다. 내 명의로 된 전세계약이나 내 집 마련을 할 때조차도 저 도장은 쓰이지 않았다. 그때는 이미 서명으로도 충분했기 때문이다.
행여나 깨질까 나만에 금고에 넣어뒀다가 오늘 이 글을 쓰면서 꺼내보았다.
"울 아기 닮아서 도장도 이쁘다"
아빠가 이 도장을 주실 때 하신 말씀이다.
그때, 아빠께서 막도장과는 차별화된 도장이라는 것을 강조하시면서 무슨 도장이라고 말씀해 주셨는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우리 아기처럼 예쁜 빨간색에 투명한 몸체에 조개와 꽃잎도 들어 있는 걸로 아빠가 직접 고르셨다'시며 벅차해 하셨다.
4n살의 나는 거실에서 쉬고 계시는 아버지께 쪼르르 달려가서
"아빠, 이 도장이 무슨 도장이라고 하셨죠?"라고 묻는다.
아흔이 다 되어가시는 아빠는 그 도장을 한눈에 알아보시고, 함박웃음을 지으신다.
"글쎄.. 아가, 이거 이름이 있는데 아빠가 하도 오래돼서 까먹었다." 하신다.
하긴. 30년도 더 전의 일인데 기억이 안 나시겠지. 잠깐 그때로 돌아가서 무슨 도장이라고 하셨는지 들여다보고 싶다.
만들어진 용도대로도, 선물해 주신 분의 의도대로도 쓰인 적 없는 도장. 하지만 나의 마음에는 꾹- 찍혀 있다.
* 이럴 수가, 글을 쓰고 난 후 한참 지난 오늘, 우연히 내 집 마련 시 사용되었던 계약서를 보게 되었는데 멋지게도 아버지가 선물해 주신 도장이 사용되었네요? 저의 기억 오류를 양해 부탁드립니다. 아울러, 독자님께는 죄송하지만 아빠가 주신 도장이 멋지게 한방 쓰인 것 같아 행복한 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