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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솔 Oct 04. 2024

5. 아카시아 꽃이 활짝 피었어-3

모든 것을 토해낸 할머니의 창고는 공허하고 차가웠다. 텅 빈 방에 쥐는 없었지만 정말로 쥐가 살긴 살았던 건지 쥐구멍 같은 큰 구멍이 방구석에 있었다. 구멍은 야구공으로 막혀있었는데 잡동사니 무덤에 파묻혀있던 공 하나가 굴러들어 박힌 건지 아니면 쥐가 이제 볼 일 없으니 오지 말아야지, 하고 야구공을 끌어다가 막아놓았는지 모를 일이었다.   

  

“봐, 쥐 같은건 없잖니.”

“쥐는 없지만 쥐구멍은 있는걸요.”  

   

어른들은 막힌 쥐구멍을 보고도 어차피 막혔으니 들어오지 못하겠네, 라며 창고 문을 닫았다. 쥐가 살았던 것은 별 문제가 되지 않는 듯 했다.        

  

“아무래도 다 불태워야겠어”     


큰아빠가 입을 열자 모두가 큰아빠를 바라보았다. 어쨌든 청이 말대로 쥐가 살긴 살았을 수도 있으니. 더 이상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없고 말야. 다른 가족들도 그 말에 수긍했다. 할머니가 집으로 돌아오시든 돌아오시지 못하든 쥐가 있었다면 모든 물건들이 오염되었다는 의미니까 말이다.


 더 큰 문제는 커튼이었다. 조금이라도 툭- 하고 건들이면 방 안 전체가 먼지로 가득 찰 것 같아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혀왔다. 어른들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고민 중인 것 같았다. 결벽증이 있는 작은 엄마는 마스크라도 쓰고 들어오자며 커튼 근처에도 가기 싫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고모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엄마는 대체 이런 커튼 어디서 가져온 거야? 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두 사람은 커튼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있었다. 침묵을 지키던 아빠가 그거, 아버지가 시장가서 사오셨던 거잖아요. 라고 말했다.  

        

 할아버지 이야기도 우리 가족에겐 꽤나 낯선 것이었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셨다던 할아버지는 말 그대로 내겐 아무 감흥 없는 존재였으니까. 마치 엄마가 산후우울증을 겪고 동생에 대해 다 잊은 듯 굴었던 것처럼 가족들은 순정 언니도, 혁수 오빠도, 할아버지도 그렇게 창고에 넣어놓았던 잡동사니들 마냥 기억 저편에 넣고 잊어버렸다. 그러다가 지금 다시 꺼내진거겠지.      

     

도저히 먼지세례를 맞을 자신이 없어 커튼은 보류해두기로 했지만 나머지 물건들은 버리기로 결정이 난 모양이었다. 불에 함부로 태워버릴 순 없으니 소각장에 폐기하자고 결론이 났다. 돈을 받아 대신 물건을 옮겨주겠다던 동네 고물장수 아저씨가 큰 파란색 트럭을 끌고 와 할머니의 기억들을 모조리 가져갔다


. 저 물건들을 가져가고 나면 정말로 할머니의 머릿속에 든 게 아무것도 없을 것만 같아서 몰래 할머니의 비녀 하나를 숨겼다는 건 가족들에게 비밀로 하기로 했다. 듣기론 할아버지가 생전에 사주셨다던 옥비녀라고 했다. 할머니의 머리칼은 짧아져서 비녀를 사용할 일은 없을 것 같았지만.       

   

이따금 잠이 오지 않는, 정신이 또렷해지고 선연한 밤에 나는 책상 서랍안에 숨겨 둔 할머니의 비녀를 꺼내 매만져보곤 했다. 할머니가 한숨 자라며 머리칼을 쓰다듬어주던 그 기억처럼 이제는 내가 할머니의 근사한 그 은발머리칼을 쓰다듬어 주고 싶었다.     


아빠 엄마는 내가 더 이상 장롱사건을 말하지 않아 잊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런 일은 잊을 수가 없다. 잊고 싶어 할수록 곱씹어 보게 되고 더 선명해지기 때문에 차라리 생각을 멈추는게 나았다.


 할머니댁에서 지내는 동안 할머니는 언제나 밤이 되면 내 귓볼을, 뺨을, 머리칼을 다정히 매만져주며 자장가를 불러주었다. 과수원집 막내딸이였던 할머니는 결혼 후에도 할아버지와 과수원을 운영했었다고 했다. 그러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홀로 사남매를 먹여살리기 위해 과수원을 팔고 다른 일을 하며 고모까지 무사히 학교를 마칠 수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 할머니는 아는 노래가 별로 없었고 가장 잘 부를 수 있는 노래가 과수원길 이라고 했다.     


할머니의 무릎을 배고 눈을 감은 채 상상하다보면 어느새 과수원길 밖 아카시아 나무에 조롱조롱 꽃이 매달린 곳에 도착해있었다. 향긋하고 달콤한 꿀내음이 치마폭까지 가득 밴 채로 들떠서 뛰어다니면 저 멀리서 할머니가 가여운 내새끼라며 나를 꼭 안아주었다. 그 따스함에 한숨 푹 자고 일어나면 엄마는 없고 할머니가 부엌에서 나와 물 마시라며 냉수를 한 잔 떠다주시던 그 눈부신 기억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음을 아빠 엄마는 모르겠지.     


그날 밤도 그래서였나. 꿈에 할머니가 나왔다. 아카시아 꽃이 만발한 길에 저 멀리 할머니는 손을 흔들며 웃어보이더니 뒤돌아 걷고 있었다.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고 발걸음은 아무리 달음질 쳐도 그대로였다.     


할머니!     


눈을 뜨자 엄마가 이마에 손을 짚어보곤 열이 나는거 같은데 라며 걱정스레 물어왔다 내심 눈 앞에 보인게 할머니가 아닌 엄마인것이 퍽 실망스러웠다  

   

“할머니는요?”

“할머니? 잘 계신다니까?”

“꿈에 할머니가 나왔어요 할머니 보고싶어요 나도 가게 해주세요.”     


투정의 강도가 거세지자 엄마는 당혹스러운 낯빛을 하더니 아빠를 불렀다. 그런데 아빠의 얼굴도 요상했다. 들으면 안될 것을 들은 것 처럼. 내가 장롱 안에 갇혀 울다가 꺼내어진 그날의 표정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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